'무의미의 축제'에 초대받지 못하다

마흔에 자아 찾기 (20)

by 이오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완독 했다. 그의 더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가 80대에 발표한 마지막 소설 『무의미의 축제』에서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소설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삶은 원래 하찮고 의미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걸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면 된다’는 것. 소설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쉬웠던 건 끝부분에서 등장인물 중 한 명인 라몽이 아주 명확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에 나온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이 메시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는지는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바로 당신 입으로, 완벽한, 그리고 전혀 쓸모없는 공연...... 이유도 모른 채 까르르 웃는 아이들...... 아름답지 않나요, 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충분한 빌드업 없이 ‘인생은 무의미의 축제’라는 결론이 내려지기 전까지 나는 즐거운 독서를 하고 있었다. 본인을 ‘사과쟁이’라고 생각하는 알랭과 우연히 만난 전 동료에게 암에 걸렸다고 거짓말하고 거짓말을 한 이유를 본인도 알지 못하는 다르델로, 프랑스어를 못하는 척 허구의 언어를 지어 사용하는 칼리방 등 캐릭터들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어차피 삶은 무의미하므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 또한 특별한 의미 부여 없이 가볍게 즐기면 되었던 것이었을까? 자신을 낳자마자 떠나버린 어머니와 환상 속에서 화해한 알랭의 이야기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샤를의 어머니 이야기도, 스탈린의 괴짜 같고 엉뚱한 모습을 부각시킨 묘사도 이 소설의 전체 메시지와 유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나는 이 소설의 메시지가 헤르만 헤세의 소설 『황야의 이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황야의 이리』는 독자가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지식인 하리에게 깊이 공감하며 삶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진지함을 내려놓고 삶을 좀 더 가볍게 대하라는 메시지가 설득력 있게 전달된다. 반면, 『무의미의 축제』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걸 전제한 작가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쓴 소설인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와 충분한 유대를 쌓지 못한 나 같은 독자는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유튜브에는 소설에 대한 호평이 가득했지만,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하나의 주제로 어떻게 뭉쳐지는지에 대해 속시원히 설명해 주는 이는 없었다. 이후 댓글과 온라인 리뷰를 보며 평가가 엇갈리는 소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제목을 단 마지막 네 페이지가 없었더라도 독자들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알아챌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소설에 대해 받은 인상과는 별개로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다. 라몽은 샤갈 전을 보고 싶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역겹다고 말한다.


"너, 왔다가 그냥 간 게 몇 번이야?"
"벌써 세 번. 그래서 사실 여기에 샤갈을 보러 오는 게 아니라 한 주 한 주 지나며 줄이 더 길어지는 걸, 그러니까 지구에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걸 확인하러 오는 거지. 저 사람들 봐! 저 사람들이 느닷없이 샤갈을 사랑하게 됐다고 생각해? 저 사람들은 오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뭐든 다 할 준비가 돼 있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가 하라는 대로 다 해. 기막히게 조종하기 쉽다고. (중략)"
-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최근 광적으로 유행한 ‘두바이 쫀득 쿠키’와 관객수 1,500만을 넘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떠올랐다. 나는 그 둘이 훌륭한 디저트이고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상하리만큼 열광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서’인 것은 아닐까.


나는 드라마를 크게 즐기는 편은 아니어서 ‘두바이 쫀득 쿠키’나 『왕과 사는 남자』만큼이나 유행했던 드라마들을 보지 않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럴 때는 자주 대화의 흐름에서 소외되었는데도 오히려 쾌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누가 하라는 대로 다 하는’ 무력감에 대한 나의 소심한 저항이었다.


‘삶은 무의미하다니 즐겁게 살라’고 말하는 소설을 읽고 나는 삶에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삶의 무의미함’은 어쩌면 삶의 의미를 찾고자 온 힘을 다해 노력한 후에야 비로소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가 되면 이 소설이 나에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없고,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는 걸 오래전에 깨달았어. 저항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지."
-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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