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여자이고 모아 둔 돈은 없습니다

by 효용

이 글은 새벽녘 구 남친에게 헤어짐을 통보받은 당일에 쓰였다. 새벽 5시. 이른 시간임에도 눈이 떠졌다. 곧 가야 할 아침 수영 때문은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핸드폰 액정에 불을 밝혔다. 구 남친에게 온 '미안해.'라는 글자가 보였다.


장문의 카톡이었지만, 간단하게 내용을 요약할 수 있다. '모아둔 돈이 없어서'였다. 그가 보낸 많은 문장을 단축시킨 것이니 심각한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가치관의 차이,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의 얘기는, 별안간 교통사고처럼 들이닥친 이야기의 결론으론 충분했다. 모아둔 돈이 없다는 건 그간 삶을 살아온 태도가 그와 맞지 않다는 것이며, 모아둔 돈이 없으니 미래를 같이 그릴 수 없다는 거였다.


헤롱거리는 정신을 깨워 수영을 갔다가 코와 입으로 물을 몇 번이고 마시던 중 슬픔이 잠에서 깼다. 평형 발차기를 배우던 기간이었는데, 개구리 발차기는 나발이고 물에서 나올 때마다 뜨끈한 관자놀이를 식히느라 바빴다. 이제 와 생각하니 울어도 수경에 눈물이 맺혀 티도 안 났을 걸, 속 시원히 울면서 수영이나 할 걸 그랬나 싶다. 당시엔 아픈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할 기력조차 없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샤워실로 뛰어갔다. 내부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기선 울 순 없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 뒤꿈치를 든 채 몸을 웅크렸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며 소리 없이 울었다. 긴 울음은 아니었다.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감정은 크게 너울질쳤으며 나는 방향 감각도 없이 그 안을 배회했다. 내가 빠진 곳은 슬픔보단 쪽팔림의 바다였다.


난, 정말로 모아둔 돈이 없으니까.


이별 통보를 받기 전 마지막 데이트 때, 나의 통장 잔고를 유추하기 시작한 그의 질문 세례에 횡설수설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혹감에 두피가 뜨끈하게 올라온 나는 내 인생을 '욜로족'이라고 지칭한 그의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닌데, 명품백을 지르거나, 밥 먹듯 해외여행을 가거나, 비싼 식당만 고집하는, 그런 사람이 나는 아니라고, 그의 눈을 보며 말했어야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어렴풋 알고 있었던 거다. 유흥이나 명품 구매로 흥청망청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계획 없이 흥청망청 돈을 쓴 건 맞으니까. 욜로족이 나였다.


이별은 했고, 긁힌 마음은 남아있다. 변기에 웅클이고 있던 순간에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변화의 계기가 필요했다. 『서른 살 여자이고 모아 둔 돈은 없습니다.』의 탄생 이유다. 이 글은 재테크 분야도, 연애 분야도 아닐 것 같다. 에세이가 맞겠지만 다른 명칭을 하나 붙이고 싶다. '실현 분야'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한 말을 실현시킬 거니까. 마지막 대화에서 나는 그에게 3년이란 시간을 지켜봐달라고 얘기했다. 그는 떠났고, 삼 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말한 나는 여기 있다. 당시에 얼만큼 돈을 모을지 얘기하진 못했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엔 쓰겠다. 1억. 3년이 지난 2028년 8월까지 1억을 모으겠다.


얼토당토 않는 목표일 수 있다. 나도 안다. 그럼에도 여러분이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3년 후의 내가 어디까지 모았고,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그때까지 솔직하고, 찌질한 나의 회개록이자 투쟁기를 쓰겠다. 운이 좋게도 어느 날 이 책이 출판되어 여러분과 지난 X의 얘기를 하며 시시콜콜 웃고 있길 바라는 마음 또한 내비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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