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4주의 즐거움
이것은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즐거움이다. 지난 두 주간은 무언가가 즐겁다고 혼자 끄적이기에는 죄책감이 드는 시간이었다. 몇 년간 암 투병을 하신 할머니가 약 3주 전 호스피스 병동으로 들어가셨고 지지난주에는 거의 의식을 잃으셨고, 지난주에 먼 곳으로 가셨다. 할머니가 말과 초점을 잃은 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신 것이 엄마가 "정이 오라고 할까예?"라고 물었을 때라고 한다. 할머니는 "정아!"하고 눈물을 흘리셨단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음날 바로 기차를 타고 할머니를 뵈러 갔다. 할머니는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누워계셨고 그 커다란 입 안으로 말린 혀가 보였다. 초점이 없어서 그냥 조약돌 같아 보이는 할머니 눈에 억지로 눈을 맞추고 "정이 왔어요" 했더니 할머니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아이고 우짜꼬!"하셨다. 너무 늦은 병문안이었지만 그때라도 가본 것이 다행이었다. 가족들이 봄에 있을 내 결혼식과 할머니의 장례식이 겹칠까봐 우려했던 것이 사치스러운 마음으로 느껴질만큼 할머니는 더 일찍 떠나셨다.
할머니를 보내던 순간을 잘 기록해두고 싶다. 아침 일찍 장례식장으로 가서 마지막 조문객들에게 밥과 국을 내드렸고, 부모님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치우고 정산하는 과정을 도왔다. 친척들은 버스를 타고, 우리 가족은 리무진을 타고 장지로 떠났다. 장손은 나이지만 유교문화가 인정해주는 장손은 내 남동생이기에 남동생이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안고 앞좌석에 탔다. 할머니집 근처 장지로 가는 한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고모는 소리없이 계속 울었다. 동네에 들어섰을 무렵엔 엄마가 갑자기 소리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병원으로 나서던 날 할머니는 스스로 목욕을 하고 가방을 챙겨 아빠 차 앞좌석에 올라타셨단다. 돌아가실 때까지 본인의 병명을 모르셨던 할머니는 병원에 가면 다시 나아서 오실 줄 알고 약간은 신이 나서 단단한 매무새로 집을 떠나셨는데, 엄마는 그 모습이 떠올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일줄 모르고 배웅했던 동네 할머니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영정사진을 들고 할머니집 안을 한바퀴 돌았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아빠는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이제 집에 왔다!"라고 외쳤다. 할머니는 조금씩 의식이 돌아오실 때마다 집에 가자고 하셨고 아빠는 조금만 치료하면 돌아갈 수 있다고 타일렀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치료는 없었고 진통제와 수면제의 연속이었다. 할머니가 오래 누워있었던 방에 들어섰을 때 옷걸이에는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자주 입었을 옷가지 몇개가 단촐하게 걸려있었다. 엄마는 태우는 옷 용으로 할머니의 실내복을 걷었고, 나는 할머니의 '세-타'(털실 가디건)를 걷었다. 에메랄드색 털실 가디건은 내가 지난 몇 년간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자주 입고 계셨던 옷이고 손재주가 좋으셨던 할머니가 직접 만든 옷이다.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이 할머니의 옷을 어떻게 정리할까 이야기할 때부터 나는 할머니가 직접 만든 옷을 챙겨두리라 다짐했었다. 그런데 마침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그 옷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만원 한 장이 나왔다. 할머니가 주신 마지막 용돈.
하관을 하고 장례의식을 치르는 동안 그 옷을 입고 있었다. 인부들이 땅을 파고 차에 실어온 목관에서 구덩이 속 석관으로 할머니를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의에 싸인 할머니의 몸은 정말 작았다. 관을 덮고 흙으로 잘 고정시킨 뒤 아빠부터 차례대로 취토를 했다. 모두가 다시 울기 시작했고 내 차례가 되어 삽자루를 쥐었을 때도 눈물 때문에 내가 흙을 어디로 뿌리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봉분이 만들어지자 장례지도사 아저씨와 인부 아저씨들이 선창과 후창을 하며 봉분 위를 돌면서 밟아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아빠부터 차례대로 가족들이 그 대열에 합류하여 할머니의 노잣돈을 새끼줄에 끼워 묶었다. 다시 제례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장지를 한바퀴 돌고 내려올 때는 할머니가 따라올 수 있으니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고 했다. 이승과 저승이 갈리는 길이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가 재봉틀을 돌리던 모습을 찍어놓았던 영상을 찾아보았다. 할머니는 늘 무언가를 만드셨다. 밥을 짓고, 칼국수를 만들고, 김치를 담그고, 온갖 반찬은 물론 엿과 단술도 만드셨다. 스웨터를 뜨고 재봉질을 하셨다. 할머니의 덩치에 맞추어 만든 세타는 손주 중 가장 덩치가 작은 내게 가장 잘 맞다. 좀 까실하지만 귀엽고 동묘 같은 데서 산 빈티지 가디건 같기도 하다. 나는 할머니의 첫번째 손주이고 그래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손주이며, 유년기를 할머니가 직접 키워준 유일한 손주이다. 나는 집안 식구 중 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할머니의 특별한 손주다. 그러니 내멋대로 할머니의 세타를 유품 삼은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오냐 해주실 거다. 엄마가 세타 드라이 맡기라고 했지만 한동안은 그냥 둘 생각이다. 시골 방 냄새가 묻어 있고 그건 할머니 냄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