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영업글
수진은 혜나가 자꾸 눈에 밟힌다. 추운 날 껴입지 않은 채로 늦은 시간까지 바닷가에서 혼자 놀고 있던 아이에게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그 아이가 결국은 쓰레기봉투에 담겨진 채로 조금씩 죽어가고 있던 것을 발견했을 때, 수진은 아 이게 운명이구나 했을 거다. [마더]는 그렇게 수진이 혜나를 가정폭력으로부터 유괴해내는 이야기이다.
[마더]는 엄마란 귀속지위가 아니라 성취지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기도 원치 않는 사이 엄마가 되어버린 여자가 아이를 쓰레기봉투에 버려두었을 때, 엄마가 되기로 결심한 다른 여자는 가진 모든 것을 내걸고 그 아이를 지킨다. 아이를 낳았다고 무조건 엄마가 되는 건 아니다. 스스로를 엄마라고 여기고 책임을 지고 실수를 만회하며 서서히 엄마가 ‘되어가는’ 것이다.
모성애가 그토록 고귀한 가치가 된 데에는, 게다가 부성애보다도 더 강조되어온 데에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 아이를 낳는다는 생물학적 사실이 큰 몫을 하는 듯하다. (‘Mama’s baby, Papa’s maybe’ 이런거?) 한때 탯줄로 이어진 한 몸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자연스레 모성애를 갖는다(고 여겨지곤 한다). 틀린 건 아닐테다. 아이를 낳아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엄마의 아이로서 나는 아주 마음이 힘든 날에 엄마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하곤 한다. 탯줄, 그것도 되게 중요한 거다. 그렇다 하여도 그게 다는 아닐테다. 그저 제몸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자연적으로 엄마 자격을 귀속 받고 모성애라는 이름 하에 모든 것을 감내할 줄 알게 되는 건 아닐거다. 아이를 품고 있는 기간부터 그 후 아이를 독립시키기까지 그 기나긴 과정에서 엄마의 윤리, 가치는 비로소 성취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수진은 더 고귀해보인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 속에서 “엄마니까"라는 지독히도 통속적인 말이 자꾸만 반복되어도 불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