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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Jun 29. 2020

과대평가된 한무제와 위청, 곽거병의 흉노 정벌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한무제가 동쪽을 원정하고 서쪽을 토벌하면서 개척한 땅이 심히 넓었으며, 나중의 전성기 때의 강역에 대해서는 이미 간단하게 그 규모를 서술하였다. 역사 연구자들은 이를 종종 칭송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나라 때 사람들의 의론은 한무제에 대해서는 비난 섞인 평가를 내린다. 어째서일까 ?  이 때의 개척은 중국의 힘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만약에 한무제가 아니었다고 해도 반드시 일어나서 그 공을 거둘 사람이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한무제는 생각이 짧고, 움직임이 가벼우며, 기쁨과 분노를 감정에 따라 마음껏 발산하며, 인력을 사사로움을 위해 동원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었으니 실제로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가릴 수 없다. 

 

『사기』「위장군열전衛將軍列傳」에서는 위청衛青이 한무제의 비위를 맞추어 아부를 떨었다고 하였다. 또한 곽거병霍去病은 어렸을 적부터 시중이 되어 고귀해졌기 때문에 병사들을 살피지 않았다. 예컨대 곽거병이 돌아왔을 때 물자 운반 하던 수레에는 여분의 고기와 곡식이 버려져 있었는데, 사졸들에게서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또한 곽거병이 새외에 있을 적에 병졸들은 군량이 부족해서 힘을 쓰지 못할 때도 있었던 반면, 곽거병은 군영에서 공을 차고 놀았으며, 이런 일들이 꽤 많았다. 어찌 이런 자들을 장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들과 이광李廣이 군대를 지휘했던 것과 비교해보자. 이광은 보급이 끊긴 곳에서, 물을 발견했어도, 사졸들이 다 마시지 않으면, 물 근처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졸들이 제대로 먹지 못 했을 경우, 이광은 과연 얼마나 먹었을까? 또한 이광리李廣利가 다시 대완을 정벌할 때, 돈황에서 6만명이 출동했었고, 병사들이 사사로이 부리는 종자들은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고, 말은 삼만 필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군대가 귀환했을 때 옥문관으로 들어온 것은 만 여 명, 말은 천 여 필에 불과했다. 이에 대해 역사서에서는 후발대는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며, 전투에서 죽은 이도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장수과 하급 관리들이 탐욕을 부려 병졸들을 아끼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의 물건을 빼앗기도 했다. 이 때문에 고인이 된 자가 많으니, 그들이 사졸을 아끼지 않은 것은 곽거병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한무제가 일찍이 곽거병에게 손오병법孫吳兵法을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런데 곽거병은 이에 "전략이 어떤지만 고려하면 되므로 옛 병법을 배울 것까지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는 곽거병이 배우질 않아 유능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한무제도 삼군三軍의 군대를 가벼이 병법도 모르는 장수에게 건네주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는 이를 미담이라고 여기지만, 기실 이익만을 쫓는 소인들의 견해일 뿐이다. 위청과 곽거병이 승리를 거둔 까닭은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가 일종의 상비군이었으며, 여러 노련한 장수가 거느린 부대도 자주 교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뿐이지 그들의 유능함 때문이 아니다. 예컨대『한서』「곽거병전」에 따르면, 곽거병이 감히 깊게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항상 건실한 기병들이 대군의 전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천운으로 보급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곽거병의 불패가 천운때문이라는 것은 믿을 만하며, 그가 깊이 진입한 사실도 병법을 잘 모른다는 것과 부합한다.     


한나라는 봉건 시대로부터 가까웠기 때문에 사士들이 모험을 통해 공명을 세우기를 좋아했고, 의리에 대해서는 무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어리석은 충성이라고 여겼으니, 후세와는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이광의 일을 가지고 논해보겠다. 이광과 정불식程不識은 모두 변경의 명장으로 흉노는 그들을 오랫동안 두려워하였다. 또한 일찍이 위위衛尉로 있으면서 한무제도 그들의 유능함을 안 지 오래였다. 따라서 호胡를 정벌하기 위해서 대장군을 선발하는데, 이광과 정불식 등이 아니라면 누가 되겠는가? 그런데 한무제는 처음에 위청과 곽거병을, 나중에는 이광리를 임명하였다. 황후의 거처인 초방椒房의 친척들을 여러 공신과 노련한 장수 위에 두니, 전사들의 사기가 줄어들지 않을 리 있겠는가?


예컨대, 위청의 아버지인 정계鄭季는 평양후平陽侯의 집에서 일을 했었다. 그런데 평양후의 첩인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위청을 낳았고, 위씨의 성을 덮어썼다. 위온의 장녀인 위군유衛君孺는 태복太僕 공손하公孫賀의 처가 되었다. 차녀인 위소아衛小兒는 먼저 곽중유霍仲孺와 사통해서 곽거병을 낳았고, 나중에 첨사詹事 진장陳掌의 아내가 되었다. 그 다음 딸인 위자부衛子夫는 평양공주平陽公主 집에서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고, 원삭 원년 남자 아이를 낳아 황후로 세워졌다. 그런데 이전에 한무제의 황후가 되었던 진황후陳皇后는 대장공주大長公主의 딸이었다. 대장공주는 위자부가 한무제의 총애를 받아 임신했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시켜 위청을 체포해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기랑騎郎이었던 공손오公孫敖가 장사들을 데리고 가서 위청을 가로챘고, 위청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위청이 이광의 부대로 갔을 때에도 방금 후의 작위를 상실한 공손오는 함께 흉노의 선우와 맞딱뜨리고자 하였다. 한편 공손하도 위청을 따라 장수가 되어 공을 세웠고, 이에 나중에 상相이 되었다. 그리고 진장 역시 한무제가 불러 귀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광리 역시 한무제의 비인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였다. 


원수元狩 4년의 전투에 관해서 말하자면, 한무제는 곽거병으로 하여금 흉노 선우와 대적시켰기 때문에 그의 사졸들은 전력을 다해 감히 깊게 진입하였다. 하지만 위청의 임무는 본디 아주 중요하지 않았다.『사기』「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광이 수차례 스스로 가겠다고 청했지만, 한무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허락하고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실록이 아니다. 이미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다시 선봉을 맡게 시킨단 말인가? 그리고


"장성 밖으로 나간 뒤 위청이 포로를 잡아서 흉노 선우의 위치를 알게 되어 스스로 정예병을 이끌고 진격하였고, 이광은 우장군의 군대로 편입되었다."


이는 분명히 한무제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또한 


"위청은 한무제로부터 암암리에 경고를 받았다. 하지만 위청은 이광이 늙었을 뿐만 아니라 수차례나 자신과 합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선우와 맞딱뜨리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역시 말도 안되는 모함에 불과하다. 한무제가 이미 위청에게 선우와 맞딱뜨리지 않도록 시켰으며, 또한 그 스스로 이광을 전장군으로 임명하였는데,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이광이 중간에 길을 잃었던 것을 가지고 위청은 그를 겁박하여 자살시켰는데, 이는 한무제의 명령을 어긴 것 뿐만 아니라, 중신을 죽여버린 것이니 그 죄는 크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무제는 이를 바로잡지 못했다. 한편 이광의 아들 이감李敢은 위청이 자신의 아버지를 미워한 것을 원망하여 그를 때려서 다치게 하였다. 그러나 위청은 이 사실을 숨겼다. 아마도 사실 관계를 따지면 감히 세상에 널리 드러내지 못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곽거병이 이감을 활로 쏴서 죽여버렸다. 그런데 한무제도 이 일을 숨기고 사슴에게 받혀 죽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정장공鄭莊公이 영고숙潁考叔의 죽음에 대해서 병사들로 하여금 돼지를 바치고, 1행行 마다 개와 닭을 내어, 그를 살해한 사람을 저주한 것만 못하니, 어찌 형벌과 정치를 집행할 수 있겠는가?


이광의 가문은 위청과 곽거병, 이 둘에 대해서만 불공대천의 원수로 여겼다. 그리고 비록 이 원한으로 황제에게 감히 대들지는 않았으나, 그를 위해서 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이광의 손자인 이릉李陵은 단지 오천의 보병으로만 선우의 왕정까지 이르렀는데, 결국 패배하였다. 이에 사마천司馬遷은 이릉의 공에 대해 분석하여 언급했지만, 오히려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를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한무제는 본디 이광리에게 대군을 맡기고 이릉에게는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겼는데, 오히려 이릉이 흉노 선우와 맞써 싸웠고, 이광리의 공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다시 이릉을 위해 한무제를 설득하다가 궁형을 당했다.


따라서 한무제가 시종일관 보잘것없는 인척들만 보호했던 것과는 달리 이릉의 가문은 멸족시켰으니, 이는 진실로 형벌을 남용하는 것을 자랑하고, 신하들을 지푸라기로만 간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만이 유일하게 이릉이 살아서 흉노에 투항하여 가문의 명성을 붕괴시킨 것을 안타까워 했으며, 반면에 농서隴西 지방의 사대부들은 이릉의 가문을 수치라고 여겼다. 전제 군주의 시대, 사대부들의 견해는 정말이지 우리와 같은 소인배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따라서 이런 장군들을 얻어 임용하고, 사졸과 병마의 비용도 이와 같았는데, 흉노가 한무제의 시대 끝내 평정되지 않았으니, 이를 가리켜 한무제가 용병술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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