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여사면 《진한사》의 전한시대 부분 번역을 2/3정도 마쳤습니다. 아마 내년 말에는 왕망의 몰락까지 번역을 마칠 것 같고, 어디 출판할 곳을 수소문할 예정입니다. 이 책을 번역하기로 마음 먹은 까닭은 바로 이번에 브런치에 올린 부분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유가와 법가의 경제 이론과 한무제 때의 사회경제 상황에 관한 통설을 뒤집어 엎을 뿐 아니라, 제 박사논문 주제 탐색에 가장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법가의 비조 가운데 하나인 상앙은 중농정책을 극력 실천에 옮기지만, 한무제 때 법가 관료인 상홍양은 중상정책을 추진합니다. 즉, 같은 법가라고 하지만 경제 정책이 정반대로 변화합니다. 그런데 이런 진말한초의 법가 관료의 경제정책 전환을 지적한 연구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법가에 관한 연구는 황제 권력의 강화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진한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당시 황제권의 강화에만 집작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어쩌면 진한시대 들어 황제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는 건 일종에 프레임에 가깝다고 봅니다. 보통 전국 시대 말부터 군주가 모든 백성들을 강제로 징집할 수 있다고 보며, 이는 황제가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근거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저는 한나라 초까지 군사제도는 징병제가 아니라 작위 수여를 매개로 한 용병제에 가까웠다고 보며, 당시 황제들의 권력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드러내 준다고 생각합니다. 기실 여사면 선생 뿐 아니라, 전목과 여영시 등의 일세를 풍미한 학자들도 진한시대 황제전제체제라는 건 허상에 가깝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중국사 개설 수업에서 저 세 학자들의 저작들은 자주 언급될 겁니다. 하지만 그 학술사적 의의는 잘 언급되지 않습니다. 즉, 유명하니까 일단 언급해주지라는 식으로 취급받고 있는 셈입니다.
한무제가 백성에게 직접 수취한 세금은 아니지만, 기실 훨씬 심하게 해친 것이 바로 동전에 관한 규정이다.
여후呂后 2년(기원전 186년) 팔수전八銖錢을 발행하였다. 응소應劭는 이것이 곧 반량전半兩錢이라고 하였다. 여후 6년(기원전 182년), 오분전五分錢을발행하였다. 응소는 이것이 곧 협전莢錢, 즉 콩껍질만큼 얇은 동전이라고 하였다. 한문제 5년(기원전 175년), 사사로이 몰래 동전을 주조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철폐하였고, 아울러 사수전四銖錢을 발행하였는데, 액면가는 여전히 반량이었다. 참고로 수銖,량兩은 무게 단위이다. 당시 돈의 가치는 액면가 뿐만이 아니라 실제 중량에 의해서도 결정되었다.따라서 돈이 무게가 무거워질수록 실질 가치가 올라갔고, 가벼워질수록 실질 가치가 내려갔다. 비록 표면상의 돈의 가치를 가리키는 액면가는 여전히 같다고 하더라도, 팔수전에서 사수전으로 무게가 절반이 내려갔기 때문에 실질 가치도 절반으로 떨어졌고,동전의 가치가 떨어지니 물가가 상승하였다. 예컨대, 팔수전이 주로 유통되었을 때 사과 하나의 가격이 반량 한 닢이었다면, 사수전이 발행되기 시작하자, 사과 하나의 가격이 반량 두 닢이 되었다.
당시 멋대로 동전으로 주조하는 폐단이 너무 커서 가의賈誼가 간언했지만 한문제는 듣지 않았다. 한무제 건원建元 2년(기원전 139년) 2월 삼수전三銖錢을 발행하였다. 한무제 건원 5년(기원전 136년) 삼수전을 폐기하고, 다시 한문제 때의 사수반량전을 발행하였다. 한무제 건원 연간부터 사수반량전의 유통은 줄어들었지만, 많은 현급 관리들이 종종 동광에서 동전을 주조하고, 백성들도 몰래 동전을 주조하는 일들이 셀 수 없이 많아졌다. 따라서 화폐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서 가치가 가벼워진 반면, 물건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어 비싸졌다. 이에 담당 관리가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가죽과 비단[皮幣]이 제후들이 서로 방문할 때 제공하는 선물로 쓰였습니다. 또한 금은 세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황금이 상급, 백금白金이 중급, 적금赤金은 하급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반량전의 법정 중량은 4수인데, 간사하거나 도적질을 일삼는 이들이 동전의 뒷면을 갈아서 나온 부스러기를 녹여 다른 동전을 주조합니다. 따라서 동전은 더욱 가볍고 얇게 변하고 물가는 오르니, 먼 곳까지 화폐를 유통시키려 해도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을 절감할 수 없습니다.”
당시 동전 주조는 큰 이익을 내는 사업이었다.이에 동광을 소유하지 못한 이들은 동전을 갈아서 나온 부스러기를 녹여 다시 동전을 주조해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였다.그런데 동전을 갈면 그 무게가 줄어들어 실질가치가 떨어진다.뿐만 아니라 시중에 유통되는 동전의 수량도 증가하기 때문에,현물 대비 동전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어 물가는 훨씬 더 상승하게 되었다.
이에 가로세로 한 척 크기의 하얀 사슴의 가죽에 화려한 문양을 넣어 가죽 화폐[皮幣]를 만들었고, 그 가치는 40만 전이었다. 그리고 제후들이나 종실의 구성원들이 한무제를 알현하고, 서로를 방문할 때 반드시 가죽 화폐를 예물로 주게 시키게 해서 유통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은과 주석을 섞어서 백금白金을 주조하였다. 하늘을 움직일 때는 용 만한 것이 없고, 땅을 움직일 때는 말 만한 것이 없으며, 사람에게는 거북이 만한 것이 없다고 여겨서 이에 따라 원수元狩 4년(기원전 119년)에 백금을 세 등급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첫째의 중량은 8량으로 둥글게 만들었고, 용을 새겨 넣었으며 백선白選이라고 불렀다. 그 가치는 3000 전이었다. 둘째는 중량을 약간 줄이고 사각형으로 만들었으며, 말을 새겨 넣었다. 그 가치는 500 전이었다. 셋째는 중량을 더 줄이고 타원형으로 만들었으며, 거북이를 새겨 넣었다. 그 가치는 300 전이었다. 그리고 현급 관리들에게 반량전을 녹여서 다시 삼수전三銖錢을 주조하게 시켰으며, 그 무게도 3수라는 액면가와 같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백금과 동전을 몰래 주조하는 이들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하급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몰래 백금을 주조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에 담당 관리가 삼수전은 가벼워서 쉽게 사기를 칠 수 있으니 여러 군국으로 하여금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하며, 동전 둘레를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만들어서, 동전을 갈아 부스러기를 얻지 못하게 하도록 요청하였다.
백금과 오수전의 제조가 시작된 뒤 오 년 후 사면령이 내렸다. 그러나 하급 관리와 백성들 가운데 몰래 백금과 동전을 주조한 죄로 사형을 당한 이들이 이미 수 십 만에 달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죄가 발각되지도 않았는데 살해를 당한 이도 셀 수 없었다. 스스로의 죄를 자백해서 사면을 받은 이들은 백 여 만 명이었는데, 자백하지 않은 이들도 태반이 되었다. 천하는 백금과 동전을 멋대로 주조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군국에서 많은 이들이 동전 주조할 때 농간을 부렸고, 많은 동전들이 가벼워졌다.
그래서 공경들은 경사에 있는 주조를 담당하는 관서로 하여금 동전의 테두리를 붉게 도금하고, 이 동전 하나가 기존의 동전 다섯 개의 가치라고 설정하였으며, 관부가 세금을 징수할 때 동전에 붉은 테두리가 없다면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요청하였다. 한편, 백금의 가치가 약간 낮아져서 민간에서는 이를 원래처럼 비싼 가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비록 정부에서 명령을 내려 이를 금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원정元鼎 2년(기원전 115년) 일 년이 훌쩍 지난 뒤 백금은 결국 폐기되어 발행되지 않았다. 이 년 뒤, 테두리를 붉게 도금한 동전도 가치가 떨어졌고, 민간에서도 편법으로 이를 사용하니, 애로 사항이 발생해서 역시 폐기되었다. 이에 한무제는 모든 군국에서 동전 주조를 금지하고, 전적으로 상림의 세 관서에서 동전을 주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이 세 관서에서 주조된 동전이 많아지니, 천하에 명령을 내려 이곳에서 발행한 돈이 아닌 것은 유통시키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여러 군국에서 이전에 주조했던 동전들은 모두 폐기하고 녹였으며, 여기서 나온 동을 상림의 세 관서로 운반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동전을 주조하는 일이 날로 줄어들었으며, 그 비용도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오직 출중한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큰 도적들 만이 동전을 주조하게 되었다.
한나라가 이 때 시행한 것들을 살펴보면, 실무 계획과 관련 이론에 상당히 부합했기 때문에, 동전에 관련된 법이 이 때부터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이미 입은 피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 였다.
한무제가 등용했던, 이익에 관해 말한 신하들, 즉 공근, 동곽함양, 그리고 상홍양에 대해서『사기』「평준서」는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을에 나는 동물의 털도 셀 법한 이들이라고 하였다. 동곽함양은 제나라에서 대규모로 소금을 끓여 생산했었고, 공근은 남양南陽에서 크게 제철업을 경영했었는데, 정당시鄭當時라는 이가 그들을 천거했다. 당시는 자신의 협행에 만족해하면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는 이들이 있었다. 공근과 동곽함양도 아마도 조착晁錯이 언급한 “왕후들과 교류하는, 실질적인 권력은 하급 관리의 세력보다 더 큰” 그런 자들 이었을 것이며, 그 밖의 행적은 살펴볼 길이 없다.
상홍양은 낙양 상인의 아들로 지모가 있어 13세에 시중이 되었다. 상홍양의 주장은『염철론』에서 볼 수 있다.『염철론』은 환관桓寬이라는 이가 편찬한 것으로, 그 책에서 상홍양은 법가의 학술을 익히고, 관자管子, 상앙商鞅,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子 등을 인용해서 주장을 펼쳤고, 현량 문학들은 유가 학파의 일원으로 공자와 맹자의 말을 외우고 따랐다. 환관 역시 유학자로 상홍양의 이론을 왼쪽 소매를 벗어 어깨를 드러내며 찬성할 리 없었다. 하지만『염철론』에 기록된 양자가 서로 주고 받은 의견들을 보면, 상홍양의 이론이 꽤나 우위를 점했으니, 그가 단순히 착취만을 아는 속리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시행한 정책은 결국 폐단이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째서일까? 법가가 물가의 경중에 대해서 말한 까닭은 강한 이들을 억제하고, 약한 이들을 부축하기 위해서였다. 강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상인이다. 약한 이들은 누구일까? 바로 농민이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는 상인들이 권세를 누리는 위치에 있는데 어찌 상홍양이 그들을 억제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상홍양이 등용한 이들도 대다수가 상인이다. 상인을 등용해서 상인을 억제한다는 것은 호랑이와 호랑이 가죽 매매를 교섭하는 것과 같다.『한서』「장탕전張湯傳」에서는 “정부 기관의 사업이 흥해도 이익을 얻지 못했고, 간사한 관리들만이 물고기 잡듯 빼앗아갔다”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무제도 장탕에게 “내가 뭘 하려고 하면, 상인들이 바로 알아채서 관련 품목들을 독점한다. 마치 내 계획을 알려주는 자가 있는 것 같다”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관리들과 상인들이 늑대들처럼 간사한 일을 저지르고 다닐 것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백성들이 그들한테서 피해를 입고, 나라도 이익을 얻지 못하는 것을 어찌 이상하게 여겨야 하는가?
하지만 세금 징수에 있어서 가장 금기는 모든 세수를 농민에게서 확보하는 것이다. 기실 염철 전매제나 균수법 등은 결국 세수를 농민 이외의 사람들에게서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책에서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가중시키지는 않았지만 재정이 풍족해졌다고 했으며, 이를 상홍양, 공근, 동곽함양의 공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무제가 사방의 이민족들을 정벌하면서 비록 실책을 많이 범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민족들에 대한 계획을 철회하는 것 역시 당시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량 문학들이 염철, 주류 전매제와 균수법을 철폐하려고 했지만, 상홍양이 반박하면서, “이는 국가의 대업으로 사방의 이민족들을 통제하고, 변경을 안정시키며, 재정 확보의 근본이 되는 까닭으로 폐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