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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May 31. 2018

역사학, 무죄 추정 원칙을 근본으로 삼는 학문.

올만에 메일을 열어보니 한국 고대사를 공부하는 동학에게 편지가 왔다. 편지 마지막에 사료가 적은 고대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좋을지에 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고대사 분야는 사료가 적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전개과정을 서술하고,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정합하게 설명하기 참 힘들다. 


예컨대, 중국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장무기라는 사람의 일기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이 일기장의 많은 부분이 변색되고 썩어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12월 11일 저녁에 조민과 데이트를 했는데, 12일 아침에 입술과 눈 주위만 검게 변색된 주지약과 같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라는 내용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11일 저녁에 장무기는 조민과 데이트를 했지만, 그녀가 운우지정을 나누기를 거부해서, 이에 대타를 찾았다고 해야할까? 내가 소설가라면 이런 식으로 서술할 수 있지만, 역사학자인 나는 다른 증거가 출현할 때까지 판단을 중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어디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었다고 하자. 물론 이것은 그 때 벼농사가 시행되었다는 증거가 되지만, 한국이 벼농사의 발상지임을 증명하지 못한다. 엊그제 <산서고문화원류山西古文化源流>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산서 남부 지방이 전설상의 요순우堯舜禹가 실제로 다스린 곳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논거 중 하나가 산서 남부에서 발견된 유적들이 규모도 거대하고 출토 유물의 기술 수준도 상당하기 때문에 요순우의 전설만이 이 정도의 유적과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적이 아무리 거대하고 유물이 아무리 훌륭하더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요순우가 만들었다는 증거가 없다. 다만 요순우라는 전설의 제왕이 만들었다면, 그가 살았던 곳과 사용했던 물건들은 훌륭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전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를 포기해야 할까? 그래서 종종 인류학이나 비교 역사학, 사회학들의 연구 성과나 이론들을 참고하기도 한다. 중국사 연구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맑스주의 이론에서 차용한 고대 노예제 이론이며, 이를 세련되게 발전시킨 것이 황제지배체제, 제민지배齊民支配이론 등이다.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한제국이 성립하면서 황제 1인이 전 인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했으며, 이는 출토된 당시의 공문서를 통해 증명이 가능하다는 학설은 거의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전한 중기 선제宣帝는 어떤 조서에서 “씨밤바, 공문서는 다 구라아닌감?”이라는 한탄을 내 뱉는다. 하지만 한선제의 탄식은 진한시대가 황제가 전국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이론을 반박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든다. 왜냐하면 한 줄의 기록을 믿느니 어마무시하게 출토된 당시의 공문서를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에서 든 비유처럼 공문서를 통해 톱니바퀴처럼 중국을 다스리는 행정체제가 존재했다손 치더라도, 그게 반드시 황제가 전 인민을 그렇게 다스렸다는 보장이 없다. 저번에도 언급했다시피 군대에서 문서를 가라로 만들어 본 행정병이라면 한선제의 탄식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한 초 여후가 반포했다고 하는 《이년율령二年律令》 본문에도 황제 지배 체제를 반박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하는 구절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李恒全이 《汉初限田制和田税征收方式 - 对张家山汉简再研究》(《中国经济史研究》,2007年第一期)에서 언급하고 있다. 내 박사논문의 일부도 그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작업 중에 있다.


그래서 역사학은 이론보다는 사료를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무기가 어느날 저녁 조민과 데이트를 했지만, 다음 날 아침 주지약과 한 침대를 썼다는 기록에 대해서, 당시 남성들은 여성들을 성적 노리개로만 여겼다는 이론을 적용시킨다면 저 두 사건을 연결시킬 수 있다. 물론 저 이론이 나온 까닭은 관련 사례가  충분히 축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론에만 매몰되면 주지약의 입술과 눈 주위가 검게 변색되었다는 것을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기사 장무기가 변태라 주지약을 겁탈하면서 뚜드려 팼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입술과 눈 주위만일까? 이에 현명신공에 격중당하면 입술과 눈 주위만 검게 변색된다는 기록과 장무기가 의술에 도통했다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면, 현명신공에 가격당한 주지약을 장무기가 밤새 치료했다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장무기 성폭행론을 주장하는 측에서 장무기가 사악한 마교의 교주의 신분이었다는 사료를 발견했다면, 오히려 그가 주지약에게 현명신장을 시전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교가 사악한 무리들만 모인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장무기 역시 그들처럼 범죄를 밥 먹듯이 저지르는 놈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다른 역사학의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특히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할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조금이라도 느낀다면 아무리 그럴 듯한 논리와 이론으로 사료의 구멍을 메꿀 수 있다고 하더라도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판단을 내린 즉시 그곳에 매몰되어 사료 추적을 그만둘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내가 진한 황제 지배 체제 이론에 의문을 품게 된 것도 절대 권력자로 유명한 한무제가 염철정책을 시행할 때 사실 기존의 상인들이 저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주체였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농억상 정책을 펼쳤다는 알려진 시대에 어떤 상인들에게는 특혜를 주었다는 사실은 기존의 이론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게 중농억상 정책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반동 작용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판단 역시 중농억상 정책이라는 이론이 타당하다는 전제 아래에서 내려진 것이 때문에 저 이론을 반박하는 다른 반례들을 거듭 제시해도 무시당할 수 있다.


연구사 정리는 중요하지만, 논문 읽기에 급급하다 보면 시나브로 기존 이론에 경도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연구 성과들은 사료들을 잘 조리해서 내놓은 멋드러진 한 상 차림이기 때문에 이에 홀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따라서 어떤 주제를 관심있어서 연구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연구사 정리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부터 먼저 꼼꼼히 읽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연구사 정리와 병행하더라도 논문 읽기보다 사료 읽기에 시간을 더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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