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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Jun 04. 2018

항우의 대학살, 관중을 포기한 또 다른 숨겨진 이유.


     항우가 함양을 점령하고 진의 아방궁을 싹 불태운다음 보화와 부녀를 납치해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을  즈음이다. 어떤 이가 항우에게 말했다. 

    “관중지방은 산과 강으로 사면이 둘러싸였으며, 땅은 비옥하니, 도읍으로 삼아 패자가 될 만 합니다.” 

    하지만 항우는 진의 궁실이 모두 불타 재로 사라진 것을 보고,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부귀해졌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 옷을 입고도 밤에 돌아다니는 것 같으니 누가 이를 알아주리오.”

     설득하려한 자가 내뱉었다.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가 관을 쓴 것과 같다는데 과연 그렇군." 

     항우가 이를 듣고 그를 삶아 죽였다.  (<사기-항우본기>) 


    항우가 관중지방에서 기틀을 다시 세우지 않고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간 일은 전통 지식인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항우가 당시 관중에 도읍을 정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어리석은 짓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항우가 진의 장수 장함을 격파하고 옹왕으로 삼은 뒤에 신안에 도착했을 때 일이다.


    (항우가) 신안에 도착했다. 제후의 관리와 병사들이 예전에는 진중秦中에서 병역을 치뤘는데, 진중의 관리와 병사들이 그들을 많이 무례하게 대했다. 그런데 진나라 군대가 제후들에게 항복하게 되자, 제후의 관리와 병사들이 진나라 사람들을 노예나 심부름꾼처럼 대하면서, 멋대로 괴롭히고 모욕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나라 관리와 병사들이 서로 몰래 이야기를 나눴다. 

    “장함 장군등이 우리를 속여서 제후들에게 항복하게 시켰지만, 지금 함곡관을 들어가 진나라를 멸망하게 시킨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제후들은 우리를 포로로 잡아 동쪽으로 돌아갈 것이며, 진나라는 반드시 우리의 부모와 처자식들을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이 계획을 듣고 항우에게 보고했다.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진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이 아직 많은데, 마음 속으로는 아직 복종을 하고 있지 않다. 관중에 이르러서도 지휘를 듣지 않는다면, 일이 필시 위태로워질 것이니, 여기서 그들을 죽여버리는 것이 낫겠다. 그리고 장함등의 무리만 데리고 진으로 들어가자.” 이에 초나라 군대는 밤에 진나라 병사 20만 여 명을 습격하여 신안성 남쪽에 묻어 버렸다. (<사기-항우본기>)


    비록 진나라의 지형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방어에 용이하다고 하더라도, 이를 개발할 사람이 부족하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항우에게 학살당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이라는 숫자는 저 유명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어나간 러시아 사람들의 숫자에는 비견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삼국지>에 묘사된 십 만 단위의 대군의 전투에 익숙한 이들에게 20만 명의 죽음은 별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지금처럼 수준 높은 농경기술을 꿈 꿀 수조차도 없던 시대, 튼튼한 성인 남성은 거의 유일한 전쟁으로 황폐한 땅들을 일굴 자원이었고, 이들의 부재는 식량 생산과 비축하는 속도 뿐만 아니라, 인구 재생산 능력의 심각한 저하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훗날 유방이 항우에게 박살난 뒤 소하가 관중의 노약자 및 징병 대상이 아닌 자들도 형양으로 보내어 병력을 보충하게 만든 유명한 일화는 당시 관중지방에 건장한 성인 남성이 태부족이었음을 시사해준다. 마찬가지로, 전국시대 말 진나라가 조나라를 장평의 전투에서 박살내면서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학살하였는데, 그 때부터 조나라는 더이상 진나라와 자웅을 겨룰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항우가 관중에 도읍을 정하지 않은 것은 단지 허영심을 뽐내고 싶어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천혜의 지리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대학살 때문에 자신에 대한 원성이 찌를 듯이 높을 뿐만 아니라 개발할 사람도 태부족인 곳을 도읍으로 쉽게 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족:


   전쟁중 벌어진 성인 남성들의 대규모 사망은 불륜과 심지어 근친상간을 사회적으로 유행시킨 듯 하다. 


   가의賈誼의 《신서新書》, <계급階級>편에 污穢之罪, 즉 불륜에 관한 설명이 있다.      


  “고모, 고모부, 누나, 언니, 이모 등등과 불륜을 저지른, 즉 남녀가 서로 분별을 잃어버렸을 경우, 불륜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막과 커튼이 정돈되지 않았다고 해야한다.”


  가의는 당시 죄명을 대놓고 부르지 말고 좀 돌려 말하자고 주장하면서, 부정부패는 뇌물죄가 아니라 제기祭器가 정돈되지 않았다고 부르고, 무능함은 관직을 내려놓고 아무 임무도 맡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고 예를 들었다. 그런데 이 사례에 불륜도 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전쟁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남성들은 오직 자신의 아내뿐만이 아니라 고모, 이모, 누나, 동생들과 섹스를 즐겼을 공산이 매우 높다. 그리고 가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男女無別"라고 했다. 어쩌면 먼 옛날 중국에서 불륜이나 근친상간이 성행했기 때문에 "남녀칠세부동석" 등의 전통 윤리가 발생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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