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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Jan 21. 2021

《사기》와《한서》가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도 남긴 까닭은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사기史記》와 《한서漢書》의 저술 체례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떤 기록이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서 전승할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남긴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살인 사건의 범인이 A인지 B인지 확정할 수 없는 경우, 기전체 사서의 특징을 활용하여, A가 범인이라는 기록을 A에 관련된 전기에, B가 범인이라는 기록을 B라는 전기에 남긴다. 이러한 신중한 역사 기술 태도는 어쩌면 오늘날 학자들보다 더욱 의고적인 정신에 충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의심스러운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화綏和 2년(기원전 7년) 한성제漢成帝가 붕어하였다. 『한서漢書』「외척전外戚傳」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성제는 평소에 강건하고 아무 질병이 없었다. 간 밤에는 평온했다. 그런데 동 틀 무렵 바지를 걸치려다가 옷을 놓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시계에 따르면 10 각刻이 지난 뒤 붕어하였다. 민간에서는 이 일을 조소의趙昭儀의 탓으로 돌렸다. 황태후는 액정掖庭의 환관들과 후궁들을 불러 모았다. 또한 어사와 승상 그리고 정위가 함께 이 사건을 살피고 한성제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병을 앓고 있었는지 묻게 시켰다. 한편 조소의는 자살하였다. 


그런데 『한서』「원후전元后傳」왕봉王鳳이 조회에 참여한 정도공왕定陶共王을 돌려보낼 때가 왔다고 말했을 때 한성제는 정도공왕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아직 아들이 없다. 사람 목숨의 무상함은 피할 수 없다. 이번 조회에서는 아직 그게 있었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러니 네가 오래 머물러 나를 시중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왕봉의 재촉을 막지 못하고 정도공왕을 자신의 나라로 돌려보내야 했다. 한성제와 정도공왕은 서로 눈물을 흘리며 헤어졌다. 이는 마치 한성제가 아침 저녁으로 위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성제가 평소에 강건하고 아무 질병이 없었는데도 그의 붕어를 모두 조소의의 탓으로 돌렸다고 위에서 언급하였다. 즉, 하나는 나중 사람들이 책임을 왕씨에게 돌리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왕씨가 조씨에게 죄가 있다고 판정하는 말로, 이에 대한 진상을 모두 명백히 밝히지 않았다.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신뢰할 수 있기에 전승하고, 의심스러운 것도 의심스러운 것대로 전승한다. 옛 사람의 저술은 이러한 체례를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신뢰할 수 있는 사료라고 믿는 것은 잘못이다. 깊은 궁궐 안의 일을 인민들이 어찌 알아서 그 죄를 조소의에게 돌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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