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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May 05. 2021

잡설: 학문에 대한 미망에서 벗어나다


근황


5월말에 예정된 졸업 논문 디펜스를 위해 중국에 왔고 모처에서 격리 중이다. 


하지만 엊그제 논문 디펜스를 3개월 미뤄야 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왜냐하면 3명의 전문가에게 박사 논문을 보내 익명으로 진행되는 예심, 즉 盲审에서 한 명이 디펜스 불가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붕괴된 정신을 다잡고 디펜스 불가 판정을 내린 전문가의 의견을 읽어보았다.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전문가는 크게 네 가지 부분이 문제라고 지적했는데, 그 중에서 한 가지는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사항이었고, 두 가지는 지엽적인 문제였다. 기실, 수정 후 게재 의견을 낸 전문가의 비판에 비하면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 박사 논문 디펜스의 치명타를 날린 나머지 한 가지 문제는 무엇일까? 그 전문가는 내가 《二年律令-傅律》을 잘못 이해해서 부적傅籍이 하급 관리의 명단이라고 주장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나도 이 주장이 비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기존의 학설과 완전히 배치되기 때문이다. 지난 중국고중세사학회에서 발표했을 때도 많은 건설적인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본인의 학설을 재검토하고 보완해서 보다 완정한 논문으로 《중국고중세사연구》에 투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전문가는 나의 傅籍에 관한 주장이 어디가 어떻게 틀렸는지 근거를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냥 틀렸단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의 지엽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 사료를 인용 하면서 비판한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추측컨대, 그 전문가는 내 주장이 기존의 傅籍에 관한 학설과 상충되기 때문에 검토도 제대로 하지 않고, 논문 디펜스 불가 판정을 때려버린 것이리라. 


지도교수님은 일단 졸업이 중요하다면서, 내 박사 논문에서 傅籍에 관한 부분을 모두 삭제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3개월 후 재심도 역시 그 전문가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3개월 후 예심을 통과하고 논문 디펜스를 무사히 마쳐도, 박사 학위는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C刊이라고 불리는 중국의 일류 잡지에서 논문을 한 편을 출판해야 하는데, 이게 하늘의 별따기이다. 이미 1년 반 동안 투고를 했지만, 계속 리젝만 받았다. 물론 논문의 어디가 문제라는 지적같은 건 없다. 뭐.. 전 중국의 수많은 대학원생, 강사, 교수들도 학술적 성과를 위해 C刊에 투고하기 때문에 이해는 간다. 그래도 내 논문의 수준이 어디가서 뒤떨어 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욕을 잃지 않고 계속 투고 했었다.


그러나 이번 익명 심사 결과를 받고, 중국에서 학위를 취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박사 논문 예심도 대충하는데, C刊에 투고된 내 논문도 대충 심사될 것이니... 결국 모든 건 운에 달렸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런데 내 인생을 되돌아 보면 행운보다는 악운이 많았다. 몇 년 전 캐나다 맥길 대학 동아시아학과 박사 과정에 합격했지만, 대학원에서 예산 부족으로 마지막에 썰려나간 일이 떠오른다. 


기실 중국사를 계속 공부할수 있을지 여부를 운이 결정한다는 것은 오래 전에 깨달았었다. 다만 이번에 학문에 대한 미망에서 확실히 벗어나게 되었다. 광오한 말이지만,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뒤 심산유곡에 숨기라고 했는지 조금은 이해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다음 주 시작되는 문피아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웹소설을 쓰고 있다. 당장 중국에 있기 때문에 어디 취업 이력서 넣기도 마뜩치 않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에도 영어 토플 강사, 게임 회사 중국어 통번역 등의 분야에 이력서를 제출 했었으나 반려 당했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장르소설을 읽은 짬밥과, 영어와 중국어를 익히고 번역하면서 향상시킨 어휘력, 그리고 박사 공부를 하면서 단련한  글솜씨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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