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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Jun 04. 2018

공부는 정직하다

명말청초의 개혁사상가 고염무식 공부법

예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재탕했습니다. 






    예전에 EBS 다큐 프라임에서 방영한 서울대 재학생 성적 상위 1%의 공부법이 얼마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다큐멘타리에 따르면 서울대에서 A+을 맞는 학생들은 교수의 강의를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베껴놓고 시험 전에 이를 정리해서 달달외운다고 한다. 설령 자신만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있어도 이를 답안으로 쓰지 않는다. 이에 강의 시간에 던져진 화두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기를 좋아하지만, 성적이 나오지 않아 고민이었던 어느 학생도 저들처럼 강의를 달달 베끼고 외우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 많은 이들이 천하의 서울대도 주입식 교육에 찌들어 있다고 여기기 딱 좋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얼척없는 한국 대학의 교육 환경을 “고염무”식 공부방법으로 극복하고 있었다. 고염무식 공부방법을 이야기하기 전에 소위 주입식 교육에 대해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십 몇 년 전 동생이 아직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과외를 해준 적이 있다. 사회탐구 영역 가르치면서 어렵지만 꽤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에 동생왈 “학원에서 이건 중요하지 않다고 했어. 그래서 본 적이 없는데.” 뒤집어졌다. 보아하니 시험에는 항상 나오지는 않지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좀 들여야 하는, 계륵같은 내용이라 그냥 중요하지 않다고 퉁치고 넘어간 것 처럼 보였다. 사실 중위권 정도의 성적만 받는 것을 원한다면 이런 방법도 괜찮기는 하지만, 정말 내공을 쌓아서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고 싶다면 피해야 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학부모들이나 학생들이 일명 쪽집게라고 불리는 강사들이 찍어주는 문제만 풀면 성적이 잘 나올 것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즉각 이해하기 쉬운 내용들만 중요하다고 둔갑시켜서 이것만 배우면 된다고 선전하고, 학생들은 이를 곧이 곧대로 믿는다. 그런데 아무리 쉽다고 해도 처음보는 책의 요점을 한 번에 이해해서 정리를 할 수 있을까? 처음 듣는 강의를 한 번에 이해해서 요약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 선생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하지만, 학생들이 그 지식을 활용할 능력을 길러주는 훈련을 스스로 수행하지 않으면, 밑빠진 독과 같아서 그것을 담을 수 없다. 비유컨대, 고든 램지의 요리 방송을 아무리 많이 시청해도 주방에서 손가락이 칼에 베이고, 불에 데어보지 않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학생들도 강의에서 이해한 내용을 소화시키지 않으면 공부 실력이 늘지 않는다. 하지만 소위 1타 강사들의 수업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를 듣고 배운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져있게 된다. 이 때문에 한국 교육을 주입식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식의 전달을 학생의 수용여부는 고려치 않고 전적으로 교사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이다.  


    물론 귀에 쏙쏙 박히게 요약 정리 잘 해주는 수업이 반드시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기왕에 들을 거면 제대로 들으라는 말이다. 바로 고염무가 그랬던 것 처럼 교사가 토씨하나 빼놓지 않고 강의안을 듣고 베껴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고염무는 공부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베껴쓰기라고 하였다. 다큐프라임에서 보여준 서울대 성적 상위 1% 학생들도 이렇게 공부했다. 이렇게 공부하면 적어도 자신이 배운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에 아무리 비판적으로 사고해도 배운 내용과 관련이 없다면, 이해를 엉터리로 해서 시험 주제에서 벗어난 글을 쓴다면,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진시황의 진나라가 왜 2대 만에 망했는지에 대해서 논술할 때, 진시황의 폭정이 사실은 폭정이 아니라는 새로운 관점만 이야기한다면, F를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말도 안되는 헛소리는 백지장 차이에 불과하다. 고염무는 명말청초에 경세치용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고, 중국사에서 비판적인 태도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상가 중에 하나이다. 그는 책을 지루하게 외우고 베껴쓴다고 해서 창의적, 비판적 사고 능력이 감퇴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넘사벽의 통찰력이 생긴다는 것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야구 덕후라면 누구나 아는 웹툰 “클로저 이상용”의 주인공 “이상용”은 탁월한 수싸움으로 웬만한 타자들을 130 초중반의 직구로 요리한다. 그의 통찰력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몇 년 동안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하나하나 분석한 결과이다. 고염무도 부지런하게 베껴서 모은 자료를 요약정리해서 “명이대방록”과 “일지록”이라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뉴턴도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서울대 성적 상위 1%의 학생들이 한 작업이 바로 거인의 어깨를 올라타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창의력과 비판력을 길러주는 토론 수업은 이런 정직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공통된 화두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토론 수업이 가능하겠는가. 비록 저 화두를 학생들에게 제대로 이해시킨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대학에서는 토론 수업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강사 한 명이 가르치는 학생이 20명 이상이 되는 순간 토론 수업은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토론 수업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단순한 무대가 아니다. 강사는 100분 토론의 사회자 역할을 해야한다. 논점을 일탈하면 바로 잡아주고, 논리의 비약이 생기면 잡아주고, 수업 마지막에 토론의 내용을 정리해주어야 한다. 이런 형태의 수업은 아마도 많아야 열 명 정도 듣는 비인기 학과 전공 강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학과에서조차도 이렇게 수업을 한다면 학생들이 수강을 기피해서 폐강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사는 학생 개개인이 얼마나 수업 준비를 해왔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수두룩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유태인들을 부러워 하면서, 그들처럼 토론의 전통이 있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창의력과 비판적 사고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우리도 토론의 전통이 있었다. 토론의 전통이 없었다면 막 대학원에 진학한 기대승이 유명 대학 학장인 이황에게 사단칠정론이라는 토론 배틀을 과연 신청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계급장을 떼고 붙은 배틀이었다. 무엇이 이 전통을 붕괴시켰을까. 우선 과도한 교육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규 수업이 끝나고도 여러 학원을 다닐 수 밖에 없어서 부모의 눈을 속이는 것만 배운 아이들이 창의력, 통찰력, 비판적 사고의 기반인 정직하게 공부하는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뿐만 아니라 대학이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강사의 숫자를 가능한 줄여버리니 토론 수업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적어도 문과 계열 전공에서 필요한 것은 삐까뻔쩍한 건물과 시설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책과 강사들이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사이비가 판치는 한국 사회가 헬조센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비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한 두 개가 있다고 믿고 싶으며, 공부 또한 여기에 속한다고 믿고 싶다. 나는 서울대 성적 상위 1% 학생들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그들이 공부는 무릇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해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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