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목란 바라기 Nov 21. 2018

항우는 그저 난폭하기만 했을까?

여사면의 <진한사秦漢史> 번역 프로젝트 

    항량은 동아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정도에 도착해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항우 등은 이유도 베었으니, 날로 진秦나라를 경시하고, 자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에 대해 송의宋義가 간언했지만 듣지 않았으며, 이에 송의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버렸다. 송의는 제나라로 가는 길에 고릉군高陵君 현顯을 만났다. 


    “공께서는 무신군 항량을 뵈러 가시오?”

    “그렇습니다.”

    “저는 무신군 항량의 군대가 반드시 패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공께서 천천히 간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테고, 빨리 간다면 화를 입을 것입니다.”


    진秦나라는 과연 병력을 더 일으켜 장한章邯에게 보냈다. 장한은 초나라 군대를 공격해서 정도에서 대파하였다. 항량이 죽었다. 이 때가 이세 황제 2년 9월이었다. 유방과 항우는 외황을 떠나 진류陳留[1]를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방과 항우는 서로 의논했다. 


    “지금 항량군이 격파되어 사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


    이에 여신呂臣과 함께 동쪽으로 갔다. 여신군은 팽성 동쪽에, 항우군은 팽성 서쪽에, 패공은 탕에 주둔하였다. 장한은 항량군을 격파한 뒤 초나라 군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서 황하를 건너 북으로 조나라를 공격해서 대파했다. 장이와 조왕 헐은 도망쳐 거록성鉅鹿城[2]으로 들어갔다.장한은 왕리王離와 섭간涉間에게 거록을 포위하라고 명령했다. 장한은 그 남쪽에 군대를 주둔하였고, 용도甬道를 건설하여 곡식을 운반하였다. 진여는 북쪽에서 상산 지방의 수 만 병력을 얻어 거록 북쪽에 주둔하였다. 초나라 군사가 정도에서 격파되자, 초회왕은 두려워서 우대에서 팽성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항우와 여신의 군대를 병합했으며, 그들을 자신의 장수로 삼았다. 또한 여신을 사도司徒[3]로, 여신의 아버지 여청呂青을 영윤令尹으로으로 삼았으며, 유방을 탕군장碭郡長으로 삼고 무안후武安侯에 봉했으며 탕군의 병력을 거느리게 하였다. 고릉군 현이 초왕을 뵙고 말했다. 


    “송의가 무신군 항량의 군대가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과연 패배했습니다. 군대가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패배의 징조를 발견한 것은 군사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초왕은 송의를 불러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매우 기뻐하였으다. 이에 송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항우는 노공魯公으로 삼고, 차장次將으로 삼았으며, 범증을 말장末將으로 삼아서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다른 여러 장수들도 모두 송의의 휘하에 참여하였으며, 그를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렀다. 

당시 초회황은 항씨의 권력을 거의 모두 거두어 들였었다. 항량과 제나라는 뜻이 맞지 않았는데, 송의로 하여금 제나라로 사신을 보냈으니,이 두 사건의 관련성은 비록 거미줄이나 말발굽처럼 흔적이 잘 보이지 않지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량이 교만해서 패배했다는 것도 모함일지 모른다. 또한 유방에게 서쪽을 공략하고 함곡관 안으로 진입하도록 명령했다. 


    “여러 장수들과 먼저 관중關中[4]지방에 들어가 평정한 이를 왕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사기』「고조본기高祖本紀」)


    그런데 그 때 진秦나라 군대는 강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항상 승리하고,패잔병을 소탕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러 장수들 가운데 아무도 먼저 함곡관으로 진입하는 것을 이익이라고 생각한 이가 없었다. 하지만 항우 홀로 진秦나라 군대가 항량군을 격파한 것을 원망하고 분노해서 유방과 함께 함곡관으로 진입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초회왕은 여러 노장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항우의 사람됨은 경망하고 흉폭하며 간교하다. 그리고 일찍이 양성襄城을 공격했었는데 양성의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가 지나간 곳은 모두 훼멸되었다. 게다가 초나라 군대가 몇 차례 진입을 했었지만 진섭과 항량 모두 패배했다. 그러므로 장자長者, 즉 덕망있는 이를 서쪽으로 다시 보내서 진秦나라의 부형父兄들에게 의로움을 설파하는 것만 못하다. 진나라의 부형들이  그들의 주인에게 고생한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지금 장자를 보내어 노략질과 폭력을 금한다면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우는 경망하고 흉폭하기 때문에 보낼 수 없다. 패공만이 관대한 장자이기 때문에 파견할 수 있다.”


    초회왕은 항우를 끝내 허락하지 않고, 패공을 서쪽으로 보냈다. 이 말 역시 훗날에 견강부회한 말이다. 진평陳平은 “항우의 사람됨은 남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였으며(『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한신韓信도 “항우는 다른 사람과 공경하고 자애스런 모습을 보여주며, 말도 온화하게 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면서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라고 하였다.(『사기』「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이 어찌 멋대로 잔인하게 살인하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항우가 잔폭한 것은 신안新安에서 진秦나라의 항복한 병졸들을 묻어버린 일에서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병권을 쥐고 있는 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항우가 함곡관에 진입하고, 제나라를 격파한 뒤 잔학했었지만, 당시 병사들은 대개 경망하고 흉폭한 무뢰배들이며, 주요 장수가 제어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마도 항우의 병사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항우에 관한 역사 기록은 그 말이 너무 과장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유방에 관한 것 역시 기피되었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주시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에 진입했다가 패배했는데 어떻게 아래 사람들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당시 하북 지방의 일이 급했기 때문에 함곡관 진입은 다소 늦게 목표로 삼았을 것이기 때문에, 유방과 항우가 어찌 함께 함곡관으로 진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역사를 이해하는 이들은 이를 믿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송의가 안양安陽[5]에 도착해서 46일 동안이나 머무르며 진군하지 않았다. 이에 항우가 말했다. 


    “나는 진나라 군대가 조왕을 거록에서 포위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병사를 이끌고 황하를 바람처럼 건너서, 우리 초나라 군대가 외부에서 공격하고 조나라가 내응을 한다면 진나라의 군대를 분명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의가 말했다. 


    “아닙니다. 소를 무는 등에가 서캐와 이를 모두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설사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병력을 물릴 것이니 우리는 그들이 퇴각하는 틈을 타면 되며, 만약에 전투에서 진다면 우리가 병력을 이끌고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하면 됩니다. 따라서 먼저 진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싸우게 하는 것만한 계책이 없습니다. 갑주를 입고 예리한 무기를 드는 일은 저 송의가 공에 비견될 수는 없습니다만, 앉아서 계략을 운용하는 일은 공이 저 송의만 못하실 겁니다.”


    송의는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매섭기는 호랑이처럼, 고집스럽기는 양처럼, 탐욕스럽기는 늑대처럼 행동해야 하는 법이다. 끝내 억지로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베겠다.” 또한 송의는 자신의 아들 송양宋襄을 제나라로 보내 돕게 하였는데, 스스로 그를 무염無鹽[6]까지 전송하면서, 큰 연회를 열어 술을 마셨다. 그런데 당시 날씨는 춥고 큰 비까지 내려 사졸士卒들은 추위와 기아에 떨었다. 항우가 말했다. 


    “힘을 다해 진秦나라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여기서 오래 머물고 진군하지 않았다. 올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빈곤해졌고, 사졸들은 토란과 콩만 먹고 있다. 군대 어디에도 식량이 보이지 않는데, 큰 연회를 열어 술을 마시고 있다.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조나라의 군량을 빌리지도 않고, 조나라와 함께 일어나서 진秦나라를 공격하자고 하니, 그 틈을 노리자고만 한다. 진秦나라는 강하기 때문에 새로 만든 조나라를 공격하면 반드시 정복할 수 있을 것이며, 조나라가 정복되면 진나라가 더 강해질 테니 무슨 틈을 탈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군대의 최근 패배로 초왕께서는 좌불안석이 되셨다. 이에 우리 나라 안의 모든 병력을 송의 장군에게 귀속시켰기 때문에 국가 안위는 바로 지금 한 번의 행동에 달렸다. 그런데 송의는 지금 사졸들을 구흉하지도 않고 자신의 사사로움만 따르니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할 수 없다.” 


    이에 항우는 새벽에 상장군 송의를 알현하고, 그의 장막에서 그의 목을 벤 뒤 밖으로 나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송의와 제나라가 초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모의를 했기 때문에, 초왕께서 은밀히 항우에게 벌을 내리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당시 모든 장수들이 두려워 복종했으며, 감히 누구도 삐죽 나와 길을 막는 나뭇가지처럼 반항하지 못했다. 


    “초나라를 처음 세우신 이는 장군의 가문입니다. 게다가 지금 장군께서는 반란자도 주멸하셨습니다.”


    이에 모두 항우를 상장군 대리[假上將軍]로 추대한 한편, 사람을 보내 송의의 아들을 추적시켜 제나라에서 죽였다. 그리고 이를 환초에게 초회왕에게 보고시켰다. 초회왕은 이에 항우를 상장군으로 삼았으며, 당양군 경포, 포장군의 병력도 모두 항우에 귀속시켰다. 송의가 오래 머무른 것은 사실 항우와 서로 대치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송의의 승진은 제나라의 사신 덕분이고, 또한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돕게 시켰는데, 이를 가지고 그가 제나라와 모의하여 초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고 하는 것은 모함이기는 하지만, 초나라와 제나라가 함께 항씨에게 음모를 꾸몄다고 하는 것은 그럴 듯하다. 이 사건을 기록한『사기』의 해당 부분에 있는 항씨의 말도 진실은 아닐 것이다. 




      

[1] 원주 : 오늘날 하남성 진류현이다. 

[2] 원주 : 오늘날 하북성 평향현平鄉縣이다.

[3] 역주 : 은나라의 시조 설契은 순舜임금 때 우禹를 도와 치수에 공을 세웠다. 이에 순은 설에게 지금 백성이 서로 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도가 되어 교화에 힘쓰라고 하였다. 또한『주례周禮』에 기록된 주나라 때의 여섯 관청인 육관 가운데 하나라고도 하며, 안사고는 나라의 교화를 담당하는 직책이라고 하였다. 훗날 전한 말 애제哀帝때 승상을 대사도大司徒라고 고쳐 불렀다.    

[4] 역주 : 함곡관 서쪽의 진나라가 통치하던 지역을 가리킨다. 

[5] 원주 : 오늘날 산동성 조현曹縣 동쪽이다.

[6] 원주: 오늘날 산동성 동평현東平縣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학의 핵심이 위계성이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