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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Nov 27. 2018

진시황의 봉건제 폐지와 군현제의 유래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진시황秦始皇이 봉건제封建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한 것은 확실히 미증유의 사건이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을 나무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군현제의 유래는 꽤 오래되었다 


    주周나라가 동천한 이래 여러 나라들은 왕왕 멸망하거나 다시 부흥해서 옛 사람들은 봉건제가 계속 시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많이 생각했다. 그러나 나라와 가문들이 서로 다툼을 벌인 까닭은 이익때문이다. 즉, 토지와 인민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는데, 다시 봉신封臣들에게 채지采地라는 형태로 땅을 돌려준다면 어떻게 사라지지도 만족되지도 않는 욕심을 채울 수 있겠는가? 이것이 선왕의 후대가 결국 끊어진 까닭이며, 봉건제가 마침내 군현제로 변화한 까닭이다.


   『예기禮記』「왕제王制」에서는“천하의 현은 내제후內諸侯라고 하며 일종의 녹祿이다. 한편 외제후外諸侯가 있는데, 이는 계승되는 것[嗣]이다”라고 하였다. 작위와 봉록을 제정한 방법을 가지고 말하자면, 내제후와 외제후는 결코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세습되는지 여부가 다를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우선 옛날의 정착지에 대해서 살펴보면, 가장 작은 것을 취聚, 큰 것을 읍邑, 더 큰 것을 도都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취가 가장 작고, 읍은 비교적 크고, 도는 더욱 큰지 알 수 있을까?『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에 따르면 “ 1년 후에는 취가 생기고, 2년 후에는 읍이 생기며, 3년 후에는 도가 생겼다”고 하였다.『좌전左傳』장공莊公28년 조에서는 “읍에 종묘와 옛 군주들의 묘가 있으면 도라고 불렀고, 없으면 읍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그리고 약간의 도와 읍을 합쳐서 관할하면 국國이라고 불렀으며, 그곳의 군주가 세습을 하지 않으면 현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과 국이 같은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옛 책에는 국을 멸망시킨 뒤 현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많다. 뿐만 아니라, 현과 국의 발흥, 소멸, 건설, 설치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의 이름은 대다수 옛 국의 이름을 따르기 때문에, 국이 멸망되고 현이 설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예컨대 소공昭公28년(기원전 514년), 진晉나라는 기씨祁氏의 땅을 나누어 일곱 개의 현을 건설하였고, 양설씨羊舌氏의 땅에 세 개의 현을 건설하였다. 그 이전인 소공 5년에도 위계강薳啟彊은 “한씨韓氏가 통치하는 일곱 개의 읍에 모두 현이 설치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열 가문의 아홉 개 현에서 전차 900승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나머지 사십 개 현에서 수비 목적으로 4000승을 남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경대부卿大夫의 채지가 점차 커져서 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사기』「상군열전商君列傳」에 따르면 상앙商鞅이 진나라를 다스리면서 작은 도, 향鄉, 읍을 모아 현을 만들었으며, 이는 국가가 새로 건설한 것으로 그곳의 군주 지위는 세습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초楚나라는 현의 장관인 윤尹을 공公이라고 했으며, 군주는 직접 왕이라고 불렸다. 아마도 대국을 봉했기 때문에 원래 공이라고 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의 장관을 현윤이라고 이미 불렀다는 것은 다시는 세습제가 시행되지 않았음이 틀림없으며, 이는 곧 내제후라는 봉록제라고 할 수 있다. 


    현縣은 거주민의 구역이다. 『주관周官』에 기록된「현사직縣士職」에 따르면 “야野라는 행정 구역을 다스린다. 각각 그곳의 현에 있는 백성의 숫자를 관장하며,금령을 검토하고, 소송을 총괄한다”고 하였다. 군郡은 군사를 위해 설치되었다. 이에 대해 요내姚鼐는 “군이라는 명칭은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에서 시작되었다. 획득한 융적戎翟의 땅은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에 사람을 보내 지키게 하고, 융적의 백성을 다스리는 군장君長으로 삼았으며, 그곳의 이름을 군이라고 하였다.예컨대『좌전』애공哀公4년 조에는 “진晉나라 남쪽 음지陰地의 명대부命大夫”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군수郡守를 가리킨다. 또한『좌전』애공 2년 조에는 조간자趙簡子가 “상대부上大夫는 현을 받고, 하대부下大夫는 군을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군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현은 가까운 곳에 자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현에는 많은 이들이 모였고, 부유한 이들도 제법 있었지만, 군은 황량하고 남루하였으므로, 아름답고 추한 정도가 차이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일주서逸周書』「작락作雒」에서는 “천 리에 네 현이 있고, 각 현에는 네 군이 있다”고 했으니, 역시 크고 작음의 차이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국어國語』「진어晉語」에서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오夷吾가 공자 집縶에게 말했다. 

    “군君께서는 사실상 군과 현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진晉나라 땅이 진秦나라에 속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진秦나라에 가까이 있는 현은 아니기 때문에, 군과 현이 서로 관할하는 관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조趙, 위魏, 한漢의3경卿이 범范씨, 중항中行씨 그리고 지知씨의 현을 나누어 가질 때 그 현들은 자신들의 옛 현들과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는 옛날에 사람을 시켜 먼 곳의 땅을 지키게 한 제도와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나 군의 범위가 크기 때문에 속현屬縣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사기』「감무열전甘茂列傳」에서는 감무가 진왕秦王에게“의양宜陽은 큰 현입니다. 상당上黨、남양南陽에도 오래 물자가 비축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군입니다”라고 하였다. 『사기』「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에서도 춘신군이 초왕楚王에게 회북淮北의 땅은 제齊나라와 국경을 맞닿고 있는데, 그곳의 일이 급하니 군을 세우셔서 편리함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진언하면서, 이에 회북의 13현을 헌상하고, 자신은 강동江東(장강 이남 지역)에 봉해지길 청했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군의 군비가 현보다 우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초楚나라의 무巫, 검중黔中; 조趙나라의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군代郡; 연燕나라의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위魏나라의 하서河西와 상군上郡 모두 융적을 제어하던 곳이었다. 의양과 회북은 적국을 방어하는 곳이었다. 오기吳起가 위문후魏文侯를 위해서 서하西河를 지킨 것도(『사기』「오기열전吳起列傳」), 진문공晉文公이 환관 발제勃鞮에게 원原 지방의 대부에 대해 물어본 것도(『좌전』희공僖公25년 조)비슷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군현은 오래 전에 생겼다고 할 수 있다. 동주東周 시대, 여러 큰 나라들은 적지 않은 수의 군현을 확보했었다. 진시황이 여섯 나라를 멸망시킨 뒤 그 다른 나라들을 처음 복종시킬 때부터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땅들을 나누어 군을 설치하고, 신뢰할 수 있는 신하와 정예병들로 하여금 무기를 들고 그곳에서 누구인지 무슨 일로 지나가는지 검문하는 것은 새로운 제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시황의 다른 점은 천하가 쉬지 않고 벌어지는 전투로 고생했던 원인을 깊게 살펴보니 제후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면 군대를 다시 심는 꼴이 된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에 진시황 홀로 해내海內를 소유하고, 그의 자제들은 필부匹夫로 만들었으니, 그가 군현제를 실시했다고 하고 보다는, 봉건제를 폐지했다고 하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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