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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Dec 16. 2018

어쩌면 진나라는 유방에게 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여사면의 <진한사> 3장 2절, "유방과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키다"의 번역 일부입니다. 





유방이 무관武關을 공략하고, 진나라로 진입한 뒤의 일이다.


조고는 은밀히 그의 사위인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과 동생 조성趙成과 모의를 했다. 우선 낭중령郎中令으로 하여금 내응하여 거짓으로 큰 도적들이 들었다고 시켰고, 염락에게 관리를 소집하고 병사를 일으키도록 명령하였으며, 염락의 어머니를 겁박하여 조고의 저택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 염락을 파견해서 이졸吏卒 천 여 명을 거느리고 망이궁望夷宮으로 가 위령衛令을 베었다. 그리고 나서 낭중령과 염락은 함께 궁이 진입해서 황제의 휘장을 화살로 쏘아 맞혔다. 이세황제는 자살하였으며, 조고는 모든 대신과 공자들을 소집해서 이세황제를 주멸한 정황에 대해 설명했다. 


“진秦나라는 예전에는 왕국이었는데, 진시황께서 천하의 군주가 되신 뒤 칭제稱帝하셨소. 하지만 지금 옛 여섯 나라가 다시 자립하고, 진나라의 땅은 더욱 작아졌으니 허명으로 황제를 칭하는 것을 불가하오. 마땅히 옛날처럼 왕이 되는 것이 낫소.”


조고는 이세황제의 형의 아들인 공자 자영子嬰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며,그에게 재계齋戒하고 종묘宗廟를 참배한 뒤 옥새를 받게 시켰다. 자영이 재계한 지 5일 째 되는 날 그의 두 아들과 모의했다. 


“나는 조고가 초나라와 화약을 맺은 뒤, 진나라의 종실을 멸절시키고, 관중 지방의 왕이 될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따라서 나로 하여금 재계하고 종묘를 참배하게 시킨 것은 이를 틈타 그곳에서 나를 살해하려는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에 내가 병에 걸렸다고 하고 가지 않는다면 조고는 반드시 직접 올 것이다. 만약에 조고가 온다면 그를 죽이도록 하자.”


조고는 사람을 시켜 자영을 수 차례 청했지만, 자영은 가지 않았다. 이에 조고가 직접 자영에게 갔다. 자영은 재계하고 있었던 궁궐에서 조고를 암살했으며, 조고의 삼족을 멸해서 함양에 본보기로 삼았다.


「고조본기」에 따르면, 조고가 이세황제를 살해하고 사람을 보내 관중을 분할하여 각자 왕이 되자는 화약을 맺기를 원했으나, 유방은 이를 속임수로 여겼다고 한다.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비록 조고가 국정을 맡아봤지만, 지위가 본디 비천했으므로 어찌 진나라를 차지해서 대신하려는 소망을 품었을 수가 있었을까. 또한 조고가 몽염을 죽이고, 이사에게 해를 입히고, 여러 공자들을 주륙한 일이, 비록 결국 진나라를 위태롭게 했지만, 이세황제에게 불충했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세황제도 늘 조고를 신임했는데, 이 때 돌연 이세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다. 가의는 「과진론過秦論」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나라는 작은 읍들을 병합하여 큰 성을 만들었으며, 험지에 지어진 요새들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습니다. 높은 보루에서 전투를 삼가고, 관문을 폐쇄한 뒤 거점을 지키고, 등에 극戟(창의 일종)을 메고 수비했습니다. 한편 제후들은 필부匹夫였을 뿐만 아니라, 이익만을 위해 힘을 합쳤으므로, 소왕素王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끼리 친하게 교류하지도 않았고, 아래 사람들은 복종하지도 않았습니다. 명분상으로는 진나라를 망하게 한다고 했지만, 사실 이익만을 도모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진나라의 방어를 쉽게 침범하지 못할 것을 발견했었다면, 군사를 물렸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토지를 정돈하고 백성을 휴식시켜서 진나라의 폐단이 드러날 때를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약자를 거두고, 신체가 불편한 이들을 부양해서, 큰 나라의 군주들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니, 해내海内에서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목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은 가는 보좌만 얻었다면, 산동에 비록 난리가 났다고 하더라도, 진나라의 땅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에 드리는 제사도 끊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


관중을 지키는 것이 당시에도 사실 괜찮은 계책이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큰 용기를 지닌 자만이 땅을 분할하여 버릴 수 있는 법이다. 과연 이세황제가 그 정도나 되었을까? 또한 비천한 이가 존귀한 이를, 소원했던 이들이 가까운 이들의 지위를 뛰어넘는다고 하더라도 오래가는 것은 쉽지 않다. 이사도 죽었는데, 조고는 무슨 말할 것이 더 있을까. 이세황제가 근심한 바는 여러 공자들 뿐이었다. 따라서 종실과 방계 친척들의 세력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하면 위급시 서로 의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나라가 일어난 지 수 백 년이 되었기 때문에 위기시 종실 가운데 떨쳐 일어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는 인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 장한군이 패배한 이후, 조고가 이를 보고하면서 관중 지방만이라도 보전하자고 설득했지만, 이세황제가 불쾌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일을 가지고 그를 책망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종실 가운데 이를 틈타 음모를 꾸민 자도 있었을 수도 있다. 이에 반란이 초래되었고, 결국 이세황제를 죽였으며, 조고로 하여금 진나라 종실을 멸망시키고 적의 힘을 빌려 관중을 분할 받아 왕이 되고자 하려는 마음을 품게 만들었을 것 같다. 이미 호랑이 등에 탔기 때문에 내릴 수 없게 된 셈이었다[騎虎之勢]. 하지만 그 역시 유방이 믿지 않았으니, 정세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무관武關이 함락되자 진秦나라는 장수들을 파견해서 요관嶢關을 지키게 하였다. 유방이 공격하려 하자 장량이 말했다. 


“진나라 군대가 아직 강하기 때문에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먼저 사람을 보내 산 위에 깃발들을 더 많이 설치해서 그곳에 병력이 있다고 의심하게 만든 뒤,역이기와 육가陸賈를 보내 항복하는 편이 이익이라고 진나라 장수들을 설득하십시오.”


과연 진나라 장수들은 연합해서 함께 서쪽으로 함양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유방도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장량이 말했다.


“이는 저 장수들만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휘하 사졸들은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공격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에 유방은 병력을 이끌고 요관을 우회한 뒤 괴산蕢山을 넘어 진나라 군대를 남전 남쪽에서 격파하였고, 이윽고 남전에 도착하였다. 다시 북쪽에서 진나라 군대와 전투하여 대패시켰다. 다음 해, 즉 한고조漢高祖 원년元年 겨울 10월, 유방은 패수霸水 부근에 도착하였다. 진왕秦王 자영은 항복하였다. 유방은 자영을 휘하 관리에게 맡기고, 서쪽으로 함양에 진입하였다. 진나라는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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