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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pr 16. 2019

흉노족도 한문에 통달했었다.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전국시대 이전에 중국인들이 접촉한 이민족들은 대다수가 산융山戎이었다. 진한시대에 이르러서 말을 탄 도적들과 조우했는데, 《선진사》10장 1절에서 이를 논했다. 말을 탄 도적들 가운데 가장 강한 이들은 바로 흉노였다. 『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서는 먼 옛날의 북적北狄부터 다른 모두를 한 편에 망라해서 마치 흉노와 같은 민족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흉노는 중국의 문화에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깊게 물들었기 때문이다. 『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다. 


“흉노의 선조는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렸다.” 


실은 이에 대해 확실한 근거가 없지만, 몇 세대 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허망한 이야기는 아니다. 이에 대해서도 《선진사》에서 볼 수 있다. 문화는 항상 중심에서 사방으로 전파되는 법이다. 문명 민족의 사람이 야만족 안으로 들어가서 큰 우두머리가 된 경우는 손가락으로 세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사기』의 이 구절은 비록 확실하다고는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거짓이라고 판단을 내릴 이유도 없으니, 기실 더 이상 깊게 토론하기는 부족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흉노 문화가 중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는 것은 훤히 드러난다.


예컨대, 청말민초의 홍균洪鈞이 유럽 여러 나라로 공사로 부임하면서, 페르시아 학자 라시드 앗 딘, 스웨덴 학자 아브라함 도손 등의 연구성과와 옛 중국의 역사서를 상호 참조해서 지은 『원사역문정보元史譯文證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사에서는 흉노가 서쪽으로 이주한 뒤 문자를 가졌고, 시문도 짓고 노래도 읊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당시 로마에는 흉노의 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있었고, 흉노 또한 라틴어를 이해할 수 있는 이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다.”


   『사기』「흉노열전」에서는 한나라가 흉노의 선우單于에게 편지를 보냈을 때 1척 1촌 길이의 나무 조각으로 된 편지를 보냈는데, 중항열中行說이 선우로 하여금 한나라에 1척 2촌 길이의 나무 조각으로 회신을 썼으며, 인장과 봉인도 넓고 크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흉노의 편지를 보내는 도구도 기실 중국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부터 북방 민족이 서신을 보내면서 흉노만큼 글이나 뜻이 중국과 비슷한 정도로 구사하는 이들이 없었다고 하며, 그 수준이 중국측 번역자의 윤색에서 나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뿐만 아니라『한서』「서역전西域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체르첸[且末]에서부터의 지방에 관해서 중국과 다른 것을 적겠다.”


중국과 다른 점을 적고, 중국과 같은 점은 생략하는 것은 당시 역사 기술법에서는 당연하였다. 그래서 파르티아[安息國]에 관해서 그들이 가죽에 가로로 글을 써서 문서를 기록한다고 밝혔지만, 흉노 문자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바로 이것이 흉노와 중국이 같은 글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사면이 <진한사>에서 흉노를 소개하면서)





한왕조의 성립은 고대 중국어를 공용 문자로 사용한 이들끼리 동질적 정체성을 확보했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만약에 위에서 번역한 여사면의 설명이 타당하다면, 흉노를 위시한 북방 민족은 왜 한족으로 동화되지 않았을까? 그들도 한자를 공용 문자로 사용했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주제는 우리에게도 던져질 수 있다.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도 한반도를 중국에 동화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듯 하다. 초나라도 원래는 야만족 취급을 받지 않았는가. 


물론 언어의 제약때문에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삼국의 언어와 고대 중국어의 차이가, 당시 대륙의 각 지방 사투리들의 차이보다 더 심했다고 하더라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건 비슷했을 것이다. 춘추전국시대의 각 제후국들의 외교관들이 《시경》을 외운 까닭도 일상 언어로 의사소통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어도 소위 알타이어계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예컨대 중국어는 S+V+O이고, 한국어는 S+O+V라는 건 거진 상식이다. 그런데 S+V+O 어순을 가진 언어는 수식어가 대개 뒤로 가지만, S+O+V 어순에서 수식어는 앞에 붙는다. I am a Korean who teaches English라는 문장에서 who teaches English라는 구절이 Korean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중국어는 我是教英语的韩国人이라는 문장이 보여주듯, 韩国人을 꾸며주는 教英语的라는 구절이 앞에 붙는다. 또한 원나라 희곡이 한문 가운데 초고난이도인 까닭도 몽골어와 짬뽕되었기 때문이다. 즉, 고대 중국어도 주변 민족의 언어의 영향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언어의 차이가 한족과 비한족을 가르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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