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한고조漢高祖 11년 겨울, 진희陳豨를 격파하고, 태위太尉 주발周勃이 태원을 통해 진입하여 대 지방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정월,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이 방안에서 모반을 일으켜 삼족이 주멸당했다. 『사기』 「회음후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희가 거록군수鉅鹿郡守로 제수되고 , 한신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 한신은 진희의 손을 잡고, 좌우를 물리게 한 뒤, 그와 뜰을 걷기 시작했다. 한신은 아늘을 올려다 보며 탄식했다.
“그대와 대화를 할 수 있겠소? 내 그대에게 할 말이 있소.”
진희가 말했다.
“장군께서 명령을 내리시지요.”
한신이 말했다.
“공이 머물 곳은 천하의 정예병이 있는 곳이오. 그런데 공은 폐하께서 신임하고 총애하는 신하요. 다른 사람들이 공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폐하께서는 분명 믿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두 번 째로 고발되었을 때는 폐하께서 의심하실 것이오. 세 번 째라면, 반드시 노해서 스스로 병력을 거느리실 것이오. 내가 그대를 위해 안에서 거병한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진희는 평소에 한신의 유능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 말을 믿었다.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떠났다. 한신은 병을 핑계로 따라가지 않았으며, 은밀히 사람을 진희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거병을 하기만 한다면, 내가 여기에서 공을 돕겠소.”
그리고 한신은 간밤에 여러 관리들, 죄수들, 노비들에게 가짜로 조서를 내려 여후呂后와 태자를 습격하자고 가신들과 모의를 했으며, 병력 배치까지 결정한 뒤 진희의 보고를 기다렸다. 그런데 당시 한신의 사인舍人, 즉 사사로운 부하였던 자가 한신에게 죄를 저질러서, 한신은 그를 감옥에 가둔 뒤 죽이려고 하였다. 이에 그 사인의 동생이 한신이 여후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기미가 있다면서 변고가 일어날 것을 알렸다. 여후는 한신을 바로 소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무리들이 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 승상 소하蕭何와 의논해서, 거짓으로 사람을 시켜 한고조로부터 와서 진희가 이미 사로잡혀 죽었다고 말하게 시켰다. 열후와 군신들이 모두 축하를 올렸다. 소하는 한신에게 말했다.
“비록 아프시지만 억지로라도 들어오셔서 축하를 올리시지요.”
한신이 입궐하자 여후는 무사를 시켜 한신을 포박한 뒤 장락궁長樂宮의 종을 걸어둔 방에서 죽였다.
위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진희는 당초 명령을 받았을 때 반란을 품을 생각이 아직 없었는데, 한신이 어떻게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여후가 죽은 뒤 여씨 일족이 남북군의 지휘권을 상실해서 패했었다. 그런데 한신은 그 때 장안의 장상과 대신들과 아무 관계도 맺지 않고 있었는데, 어찌 자신 집안의 죄수들과 노예들만 의지해서 성공시킬 수 있었겠는가. 또한 조나라, 대나라와 장안은 서로 수 천 리나 떨어졌기 때문에 멀리서 소리를 내어 지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닿을 수 없기 때문에, 한신이 정말로 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다면, 어찌 진희의 보고를 기다려야 헸겠는가? 부대 배치가 이미 결정되었는데, 진희의 보고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도 가당한 일인가? 따라서 위의 사료가 진실되지 않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3월, 양왕梁王 팽월彭越이 모반을 일으켜 삼족이 주멸당했다. 『사기』「팽월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진희가 대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한고조는 직접 공격하러 갔다. 한고조가 한단에 도착해서 팽월에게 병력을 요청했지만, 팽월은 병이 났다고 하면서 휘하 장수를 시켜 한단에 이르게 하였다. 한고조는 분노해서, 사람을 보내 팽월을 꾸짖었다. 팽월은 두려워 직접 가서 사죄를 올리려 하였다. 그런데 그의 장수 호첩扈輒이 말했다.
"왕께서는 처음부터 가시지 않고 책망당한 뒤에야 가시려고 합니다. 하지만 가신다면 바로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일으키는 편이 낫습니다.”
하지만 팽월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병이 났다고만 했다. 어느날 팽월은 그의 태복太僕에게 화가 나서 그를 베려고 했다. 그러나 그 태복은 한나라로 도망가서 팽월과 호첩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고 알렸다. 이에 한고조는 사자를 보내 팽월을 습격해서 체포하도록 시켰다. 팽월은 미처 이를 알아채지도 못한 채 사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담당 관리는 반란의 형세가 이미 확실하니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청했다.하지만 한고조는 팽월을 사면해서 서인으로 만들고, 촉蜀 땅의 청의青衣라는 곳으로 이송시켜 살게 하였다. 팽월이 서쪽으로 정鄭 지방에 도착했을 때, 마침 여후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가는 행차와 만났다. 여후는 길에서 팽월을 만났고, 팽월은 여후에게 울면서 자신을 죄가 없다고 말했으며, 고향인 창읍昌邑에서 살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후는 승낙하였으며, 팽월과 같이 동쪽으로 낙양에 갔다. 여후는 한고조에게 본심을 밝혔다.
“팽월은 장사입니다. 지금 촉 지방으로 이주시키면 후환을 남기게 됩니다. 차라리 그를 주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첩이 삼가 그와 함께 왔습니다.
여후는 그녀의 사인舍人으로 하여금 팽월이 다시 모반을 일으켰다고 고하도록 시켰다. 정위廷尉 왕염王恬이 그의 일족을 멸하자는 주청을 쓰기 시작했으며, 한고조는 허락했다.
위의 사건을 살펴보면 한고조의 의심이 매우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팽월의 반란을 일으키려는 형세가 자못 확실했다면 어찌 그를 사면했겠는가? 이 오류 역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7월 회남왕淮南王 경포黥布가 반란을 일으켰다. 여후가 한신을 주멸한 것을 보고 경포는 두려움을 느꼈다. 한나라 조정에서 팽월을 주살하고 젓갈로 만들어 그릇에 담아 모든 제후들에게 보냈고, 경포는 다시 한 번 크게 두려움을 느꼈다. 이에 은밀히 사람을 시켜 병력을 모아 배치하였고, 근처 군에서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것에 대비하였다. 어느 날 경포가 총애하던 첩이 병에 걸려 의사에게 다녀오겠다고 청했다. 의사의 집은 중대부中大夫 분혁賁赫의 맞은 편에 있었는데, 첩이 수 차례 의사의 집으로 오자, 분혁은 스스로를 시중侍中, 즉 좌우에서 주인을 모시는 직책도 담당한다고 여겨 그녀에게 후한 선물을 보냈으며, 같이 의사의 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첩이 경포를 모시면서, 담담히 애둘러, 분혁이 장자長者라고 몇 번 거론했다. 경포는 화를 내며 말했다.
“네가 어디에서 그것을 알았느냐?”
첩은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경포는 분혁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했다. 분혁은 두려워서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대었다. 경포는 더 화를 내면서 분혁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분혁은 역참에 변고가 일어났다고 말하고 탈 것을 빌려서 장안으로 향했다. 경포가 사람을 보내 쫓았지만 잡지 못했다. 분혁은 도착해서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하면서, 경포에게 모반의 기색이 있다고 말하고는 그가 군대를 동원하기 전에 먼저 주멸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고조는 이 일을 소하에게 알렸다. 소하는 말했다.
“회남왕 경포가 반드시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분혁이 경포와 적이 되고 원한을 품어 망령되게 무함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일단은 분혁을 포박한 뒤 사람을 보내 회남왕의 일을 확인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회남왕 경포는 분혁 일가를 멸족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포는 동쪽으로 형왕荊王 유가劉賈을 공격해서 그의 병력을 빼았았다. 그리고 회수淮水를 건너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며, 초왕 유교劉交는 설薛 지방으로 도망갔다. 한고조는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봉했다. 천하에 사형을 언도받은 이들에게 사면령을 내려서 종군시키고, 제후왕의 병력도 동원한 뒤, 한고조는 직접 그 군대를 거느리고 경포를 공격했다. 12년10월, 한고조는 경포군을 추甀 지방에서 격파하였다. 경포가 도망치자 한고조는 다른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추격하였다. 경포는 예전에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와 혼인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다. 당시 오예의 아들 장사성왕長沙成王 오신吳臣이 장사왕이 되었는데, 사람을 시켜 경포에게 함께 도망가자는 의사를 피력했다. 경포는 그를 믿고 반양番陽으로 따라갔지만, 반양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편 노관盧綰이라는 풍豐출신 인물이 있었는데, 고조와 같은 리里에서 살았었다. 노관의 아버지와 한고조의 아버지는 서로 각별하게 대했다. 한고조도 노관과 같은 날 태어났으며, 리에서는 양을 잡아 두 집안을 축하했다.한고조와 노관이 장성하자 같이 글을 배웠으며, 또한 서로를 아껴주었다. 리에서는 두 집안의 아버지들이 서로 각별하고, 아들도 같은 날에 태어났으며, 장성해서도 서로 아껴주었기 때문에 다시 두 집안에 양과 술을 대접하여 축하하였다. 한고조가 아무 벼슬을 하지 않고 포의布衣를 입었던 시절, 관리와 사건이 발생해서 피신했었는데, 노관이 항상 그를 따라다니며 왔다갔다했다. 한고조가 패沛에서 봉기할 때 노관은 객客으로 따라갔다. 한고조가 한중에 들어갈 때 노관은 장군이 되었으며, 항상 시중의 역할을 맡았다.동으로 항우를 공격할 때 노관은 태위太尉가 되어 따라갔으며, 한고조의 침실까지 출입하였다. 의복, 음식, 선물등, 그가 받은 것은 여러 신하들이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소하와 조참 등이 공을 세워 특별한 예를 받고 아주 신임을 받았으나, 누구도 노관에 미치지 못했다. 진희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고조는 한단으로 가서 진희의 부대를 공격했는데, 노관도 북동쪽을 공략하였다. 진희는 왕황을 흉노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노관도 그의 신하인 장승張勝을 흉노로 보내 진희의 군대가 격파당했다고 말했다.그런데 옛 연왕燕王 장도臧荼의 아들 연衍이 아버지가 한고조에게 사로잡혔을 때 흉노로 도망쳤었으며, 마침 장승을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
“공께서 연나라에서 노관에게 중히 쓰이는 까닭은 오랑캐와의 일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연나라가 오래 보전되고 있는 까닭은 다른 제후들이 수 차례 반란을 일으켜서 전쟁이 계속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께서 연나라를 위해 급히 진희등을 멸망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하지만 이 일이 다 끝나면 다음은 연나라 차례일테며, 공들도 마찬가지로 포로가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 연나라로 하여금 진희에 대한 압박을 느슨하게 하고 오랑캐와 화친을 맺게 하지 않으시는지요. 일을 천천히 늦춘다면 오랫동안 연나라를 왕으로서 통치할 수 있으며, 한나라에 급변이 발생하면 나라는 안정될 것입니다.”
장승은 그럴 듯하다고 여겼다. 이에 사사로이 흉노로 하여금 진희를 도와 연나라를 공격하게 만들었다. 노관은 장승이 오랑캐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고 의심했으며, 글을 올려 그의 일족을 모두 주살하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진승이 돌아와서 그렇게 한 까닭을 소상히 설명하였다. 연왕 노관은 그 이치를 깨닫고 다른 사람이 그랬다고 거짓을 다시 고발했으며, 진승의 가족들을 위기를 벗어났다. 또한 노관은 은밀히 범제范齊를 진희가 있는 곳으로 보내 그가 오랬동안 도망할 수 있게 하였으며, 스스로도 군사를 동원했지만 결전을 벌이는 않았다. 그런데 진희의 한 비장裨將이 한고조에게 항복해서 범제의 일을 말했다. 한고조는 사실을 시켜 노관을 소환했다. 노관은 병이 났다고 핑계를 댔다. 한고조는 다시 벽양후辟陽侯 심이기審食其, 어사대부御史大夫 조요趙堯를 보내 연왕 노관을 영접하게 시켰으며, 이를 통해 진상을 살피고 좌우에 물어보려고 하였다. 노관은 더욱 두려워져서 성문을 닫고 숨었으며, 그의 총애하는 신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는 나와 장사왕 뿐이다. 한나라는 지난 해 봄에 회음후를 멸족하고, 여름에 팽월을 주멸하였는데 모두 여후의 계책이다. 지금 황제께서 병에 걸리셔서 정사를 여후에게 위임하셨다. 그런데 여후는 부인이라 오직 다른 성을 가진 제후왕과 대공신들을 주살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노관은 끝내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 주위 사람들도 모두 도망쳐 숨었다. 게다가 노관의 말이 밖으로 새어나갔으며, 벽양후 심이기가 듣고는 돌아가서 모두 보고하였다. 한고조는 더욱 분노했다. 또한 흉노에게 투항했던 자를 잡았는데,그에게서 장승이 그곳으로 도망쳤으며, 연나라를 위해 사신으로 활동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한고조가 말했다.
“노관이 과연 반란을 일으켰구나.”
3월, 번쾌가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했으며, 한고조는 아들 유건劉建을 연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번쾌를 공격하며 말했다.
“그는 여씨 무리로,어느 날 궁의 마차가 늦게 나오기만 한다면, 번쾌는 군사를 이끌고 척씨戚氏와 조왕趙王 여의如意의 무리를 주멸할 것입니다.”
한고조는 이를 듣고 크게 노했다. 그리고 진평의 계책을 듣고 강후絳侯 주발도 불러서 침상 아래에서 조서를 받게 하였다.
“진평은 주발을 데리고 급히 달려 번쾌를 대신해서 군을 통솔하라. 그리고 군대 내부로 진입하자 마자 번쾌의 목을 베어라.”
두 사람은 조서를 받은 뒤 이를 실행할 계책을 논의하면서 이야기하였다.
“번쾌는 황제가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며, 공도 많고, 게다가 여후의 여동생 여수呂嬃의 남편이다. 친척 관계일 뿐만 아니라 지위도 존귀하다. 황제께서 지금 분노로 인해 그를 참하라고 하시지만, 나중에 후회하실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를 체포해서 황제께 데리고 가 그 분이 직접 벌을 내리도록 하자.”
진평과 주발은 번쾌의 군영에 도착하기 전에 단상을 설치하고 부절을 사용해서 번쾌를 불렀다. 번쾌는 조서를 받으러 도착하자마자 오히려 수레 감옥에 실려 장안으로 압송되었으며, 주발은 그를 대신해서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한편 연왕 노관은 자신의 궁인, 가족, 기마 수 천 기를 데리고 장성 아래에 머무르면서 내부를 살피며, 다행히 한고조의 병이 나으면 직접 들어가 사죄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4월 한고조가 붕어하자 노관은 자신의 무리들을 이끌고 흉노로 도망쳐 들어갔다. 흉노는 노관을 동호노왕東戶盧王으로 삼았는데, 그도 몇 해 후에 죽었다. 번쾌가 장안에 도착하니 한고조는 이미 붕어했다.여후는 번쾌를 사면하고 그의 작위와 식읍을 회복시켰다.
한신과 팽월의 죄가 무고인 것은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경포도 반란의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 뿐이다. 하물며 노관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일이 수 년 동안 계속 일어나니, 한고조 자신이 죽고, 후계자는 문약해도, 다시는 반란 음모가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 왕실이 반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래 보전할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분혁과 장승의 무함을 피할 수 없었으니, 당시 여러 정세가 봉건제도와는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정세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면,마치 잔 가지들이 한 번 얽히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막고 싶어도 막을 수가 없으며, 또한 가지 하나하나만을 가지고 그 잘못을 논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나라 초기의 유씨가 아닌 다른 성씨를 가진 제후왕들 가운데 오로지 장사왕만 다섯 세대를 유지했으며, 한문제漢文帝 후後 7년 자손이 없어서 나라가 사라졌다. 장사왕이 40년 동안 존재하였지만,가장 편벽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전체 대국에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