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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pr 19. 2019

중국 사상을 학파 개념의 굴레에서 구출하기

주공칭왕설의 연구 의의에 관하여 

     중국 전통 지식인들의 사상은 흔히 유가儒家, 법가法家, 도가道家 등으로 분류됩니다. 이 분류 방식은 한대漢代의 작품들인 《사기史記-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와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물론 그 맹아는 《장자莊子-천하天下》나 《한비자韓非子-현학顯學》이라는 글들에서 발견되지만, 지금과 같은 유가니 법가니 하는 분류 체계는 한대 중기에 비로소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전국戰國-전한초前漢初 시기의 사상을 기존의 분류 방식에 끼워맞추는 것은 어딘가 타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한 초기에 활동했던 육가陸賈의 《신어新語》라는 작품은 비록 유가처럼 “인정仁政”, “덕치德治”등의 개념들을 강조했지만, 법가처럼 형벌의 기능을 인정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상당한 “황로黃老“사상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슝티에지熊鐵基의 《진한신도가약론고秦漢新到家略論考》(상해인민출판사上海人民出版, 1984년 출판)는 육가의 사상을 “신도가新道家”라고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진론過秦論》을 써서 진나라가 패망한 까닭을 설명한 가의賈誼도 법가의 정책이 진나라의 천하 통일에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진나라의 천하 통일도 시대의 요구라고 인정합니다. 이에 Micheal Loewe라는 저명한 중국학자도 당시 사상을 유가나 법가등의 한 가지 학파에 귀속시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또한 근래 학자들의 심혈을 기울여 연구하는 출토문헌들에서도 이런 현상이 보입니다. 예컨대 츄시궤이裘錫圭 선생은 곽점초간郭店楚簡의 일부인 《용성씨容成氏》와 《당우지도唐虞之道》가 어느 학파에 속하는지 확정하기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거자오광葛兆光 선생도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에서 전국말-전한 초의 사상의 융합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런 모습들은  《사기-태사공자서》와 《한서-예문지》에서 언급한 학파 분류가 비록 널리 수용되고는 있지만, 적어도 전국말-전한 초의 지식인들의 사상을 재단하는 절대적인 표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당시의 사상들이 어느 학파에 귀속되는가의 여부만 논쟁하는 것은 어쩌면 비생산적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상사 공부를 할 때 기존의 학파 분류라는 굴레는 참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부의 초점을 개별적인 논쟁 주제들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주공周公에 대한 평가, 한 발 더 나아가 그가 실제로 왕이 되어 주나라를 다스렸는지에 대한 사실 확인 여부는 당시 지식인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리던 주제입니다. 주공은 형인 무왕武王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 공신이자, 무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자 그 자리를 탐내지 않고 조카인 성왕成王을 보필한 도덕적인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세에 전래된 각종 의례를 정한 것도 바로 주공이라고 합니다. 즉, 정치적, 도덕적,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완벽한 전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물론이고 심지어 법가의 대표자인 한비자韩非子마저도 그를 찬양합니다. 물론 찬양하는 까닭은 서로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공이 사실 형인 무왕이 죽고 조카인 성왕이 장성하기 전까지 실제로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잠시나마 왕위를 찬탈한 셈이지요. 그래서 전한 말 왕망王莽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하고 신新나라를 세우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공도 그랬다고 선전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공이 주왕의 자리를 찬탈한 적이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학자들은 이 문제의 사실 여부를 고증했지만, 아직 딱 부러지는 정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주공칭왕설周公稱王說 자체의 고증이 아니라, 이 전설을 당시 지식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연구 방향을 설정하면 어떨까요. 왜냐하면 주공칭왕설에 관한 전국시대-전한 초기 지식인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흔히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가장 큰 차이는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했다는 것에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 두 사상가는 주공칭왕설에 대해서도 다른 이해를 보입니다. 맹자孟子는 《만장상萬章上》에서 주공이 신하로 남았다고 하지만 순자荀子는 《유효儒效》의 첫머리에서 주공이 무왕이 죽고 성왕이 아직 어릴 때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의 의견을 듣고 일을 처리했다고 합니다(履天下之籍,聽天下之斷). 따라서 주공칭왕설에 관해서 당시 지식인들이 어떤 의견을 개진했는지 연구하는 것은 기존의 학파 분류법을 벗어나는 괜찮은 시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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