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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pr 23. 2019

흉노 세력은 한나라의 큰 현 하나에 불과했다.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북쪽의 말을 탄 도적들을 축출하는 일은 전국시대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임호林胡와 누번樓煩 등이 모두 멸망하였다. 그러나 흉노는 근거지가 멀리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있었다. 진시황秦始皇이 몽염蒙恬을 시켜 흉노를 쫓아낼 때, 흉노의 선우는 두만頭曼이라고 불렸다. 두만은 진나라를 이기지 못하고 북으로 이주해서 십 여 년을 보냈다. 몽염이 죽고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해서 중국이 소란에 빠지자, 진나라가 파견한 변경 수비병들이 모두 돌아가 버렸다. 이에 흉노의 운신이 넓어졌으며, 다시 은근슬쩍 하남河南, 즉 오늘날 섬서성 북부 지방으로 넘어와서 옛 요새를 중국과의 경계로 삼았다.


    두만 선우에게 큰 아들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묵돌[冒頓]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사랑하는 연지[閼氏]에게서 어린 아들을 낳았다. 선우는 묵돌을 폐하고, 그 아들을 선우로 세우고 싶어했다. 이에 목돌은 선우를 죽였다. 또한 동호왕東胡王도 격파해서 멸망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월지月氏를 공격해서 도망치게 만들고,남쪽으로는 누번과 하남에 살던 백양왕白羊王도 합병했다. 뿐만 아니라, 연과 대 지방을 침략해서 몽염이 탈취했던 땅을 다시 모두 수복했으며, 옛 하남의 요새를 한나라와의 관문으로 삼았으며, 조나朝那와 부시膚施까지 이르렀으며, 다시 연과 대 지방을 노략질했다. 이 때 한나라 군대는 항우와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며, 중국은 전쟁을 위한 병기와 갑주 마련에 피폐해졌다. 그래서 묵돌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었으며, 활 줄을 당길 줄 아는 무사들을 삼십 여 만이나 확보했다. 이에 대해『사기史記』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순유부터 묵돌에 이르기까지 천 여 년 동안 어떤 때는 강성하고 어떤 때는 약했지만, 따로따로 흩어져 분리되어 살아갔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계보에 대해서는 순서대로 정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묵돌에 와서 흉노는 가장 강대해졌고, 북쪽의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켰으며, 남으로는 중국과 대적할 정도의 나라가 되었다. "


    『사기』의 이 구절은,비록 흉노의 선조들의 일들을 모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 묵돌 때 만큼 강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는 것을 중국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흉노의 역사가 모두 증거가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쪽의 오랑캐들을 모두 복종시키고, 남으로는 중국과 대적할 정도의 나라가 된 이후에도, 흉노는 다시 북쪽으로 혼유渾窳, 굴사屈射, 정령丁靈, 격곤鬲昆, 신리薪犁라는 나라들을 복속시키니 고비사막 북쪽에 사는 이들도 두려워 복종하였다. 몽골 고원과 중국 내지가 서로 대립하는 국면은 이 때 이루어졌다. 


    한나라와 흉노의 군대는 평성平城 전투에서 처음 얽혔다. 당시 흉노는 한왕 신의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했지만 패배하였다. 한고조는 승리의 기세를 틈타 북쪽으로 추격하였는데, 부대의 대부분을 보병이 차지하였다. 한고조가 먼저 평성에 도착해서 백등산白登山에 올랐다. 그러나 흉노에게 포위당했고, 7일 후 진평의 계책을 사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사기』「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는 “진평의 기묘한 계책을 사용해서 선우의 연지에게 사신을 보냈다”고 하였고, 『사기』「한왕신열전韓王信列傳」에서는“황제께서 사람을 시켜 연지에게 후한 선물을 보냈고, 연지는 묵돌을 설득했다”고 하였으며, 『사기』「흉노열전匈奴列傳」에서는 “묵돌이 왕황과 조리가 약속한 기일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한나라와 다시 어떤 음모를 꾸밀까 두려웠으며, 또 연지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 기록들을 실제 상황이 아닐 것이다.「진승상세가」에서는“진평의 계책은 기밀로 부쳐져 세상의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으며, 『한서』「흉노전」에서도 양웅楊雄이 전한 애제哀帝에게 흉노의 선우가 입조하겠다는 청원을 거절하라고 간언을 하면서 “(한고조)께서 끝내 탈출할 수 있었던 까닭에 대해서 세상 누구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무제漢武帝 태초太初 4년 “한고조께서 짐에게 평성의 근심을 남기셨다. 옛날에 제양공齊襄公이 9세조의 원수를 갚은 것에 대해서『춘추春秋』역시 크게 칭찬하였다”고 조서를 내렸다. 이에 대해 안사고는『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장공莊公 4년 조를 인용하여 주석을 달아 설명하였다. 아래는 『춘추공양전』장공 4년 조의 내용이다.  


    제양공의 9세조 제애공齊哀公은 당시 기후의 모함을 받아 주周나라에서 팽형烹刑,즉 솥에 삶아지는 벌을 받고 죽었다. 훗날 제양공은 선조의 치욕을 씻기 위해 기나라를 정벌하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전투 직전 점괘에서 제나라 군대 태반을 잃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춘추공양전』에서도 9세조나 되는 오랜 선조의 원수를 갚을 필요가 있냐는 질문을 실은 것을 보면, 당시에도 제양공의 기나라 침공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은 당시에 현명한 천자가 존재했다고 한다면, 기후는 반드시 벌받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기나라가 제양공의 시대까지 존속한 것은 천하에 현명한 천자가 없는 것을 보여준다고 여겼다. 뿐만 아니라, 천하에 현명한 천자가 없기 때문에 각 제후국들끼리 분쟁이 생겼을 때 중재할 수 있는 창구가 마련될 수 없었으며, 그래서 제양공이 복수를 위해 기나라를 멸망시킨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안사고가『춘추공양전』장공 4년 조를 인용해서 한무제의 조서를 설명한 것이 타당하다면, 한고조는 백등산에서의 탈출을 수치라고 여겼을 것이다. 


    『사기』「흉노열전」에는 흉노가 “좌현왕左賢王 이하 당호當戶에 이르기까지, 세력이 큰 이는 만 기를 거느리고, 작은 이는 수 천을 거느렸다. 모두 스물 넷의 우두머리가 있었으며, 그 직위에 임명되면 만기萬騎라고 불렸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활 줄을 당길 줄 아는 무사가 삼십 여 만 명이라는 말은 선우의 무리까지 모두 합쳐서 계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흉노 무사들의 힘은 활을 끝까지 당길 수 있을 정도이고, 모두 갑주를 착용한 기병이었으므로, 당시 장정들의 숫자가 바로 활 줄을 당길 줄 아는 무사의 숫자와 같았을 것이다. 전한 말 남흉노의 선우가 한나라에 투항한 뒤, 그들의 호구와 정예병의 숫자를 모두 고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정예병의 숫자는 당시 흉노 호구의1/4을 약간 상회하였다. 따라서 당시 흉노의 인구는 백 여 만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의賈誼가 흉노는 한나라의 큰 현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즉, 중국의 힘은 흉노족을 통제하기에 넉넉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는 바야흐로 휴양생식休養生息에 힘을 쓰고 있었으며, 또한 휘하 장수에게 한왕 신을 처벌하도록 명령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한고조 스스로 군사를 지휘했다고 하더라도 흉노에게 전력을 다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경劉敬의 계책을 받아들여 그들과 화친을 맺었다. 이 일은『사기』「유경열전」에 보인다. 


    한고조가 유경에게 묻자, 유경이 대답하였다.   

    “천하가 막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며, 사졸들도 전쟁에 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에 아직 무력으로 복속시킬 수 없습니다. 묵돌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에 올랐으며, 여러 어미되는 이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 힘이 곧 위세이니 인의로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계책을 세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의 자손들을 신하로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실행하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한고조가 말했다.

    “정말로 가능한데도, 왜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가? 무엇을 염려하는가?

    유경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적장공주嫡長公主를 그의 아내로 주면서 아울러 후한 선물도 곁들어 보내십시오. 한나라가 여자를 시집보낼 때 선물을 두둑하게 보낸다는 것을 안다면, 오랑캐는 반드시 이에 유혹되어 그녀를 선우의 연지로 삼을 것이며, 태어나는 자식도 태자가 되어 선우를 대신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들은 한나라의 풍부한 재물을 탐낼 것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매년 명절에 한나라에는 남아돌지만, 저쪽에는 부족한 것들을 위로 차원에서 보내시는 동시에, 변설에 능한 선비로 하여금 예절을 깨우치게 만드십시오. 묵돌이 살아있을 때는 사위에 불과하고, 죽어서는 외손자께서 선우가 될 것입니다. 외손자가 할아버지를 대등한 예법으로 대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군대가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차츰 신하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폐하께서 장공주를 보내실 수 없어서 종실이나 후궁에서 가짜로 공주를 칭해 보내신다면, 그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이고, 그녀를 가까이에서 귀하게 대접하지는 않을 것이니, 무익할 뿐입니다.”

    한고조가 말했다.

    “좋소.”

    이에 장공주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여후가 밤낮으로 울면서 말했다.

    “첩에게는 오직 태자와 딸 하나가 있는데, 어찌 흉노에게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한고조는 끝내 장공주를 보낼 수 없었다. 다른 집안의 딸을 장공주라고 이름해서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유경으로 하여금 가서 화친의 맹약을 맺게 시켰다. 이에 대해 『사기』「흉노열전」에서는 “매 년 흉노에게 솜[絮], 비단[繒], 술, 쌀, 음식들을 넉넉하게 바치고 화친을 맺었다”라고 하였다.


    대개 여자와 재물을 보내는 것은 당시 화의의 두 가지 조건이었다. 결혼을 통해 당장 구슬리는 기미정책을 채택해서 은밀히 점차 신하로 만드는 계책은 옛 여러 나라들에게서 많이 보이는 일로, 유경 역시 전국시대 책사의 부류였으니,그가 이러한 계책을 꾸민 것은 놀랍지 않다. 다만 당시 흉노의 형세가 이전의 오랑캐들과는 달라서 다시는 이 책략을 통해 복속시킬 수 없었다. 예전에는 일찍이 열리지 못했던 국면이 개척된 셈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유경만을 탓할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적장공주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는 것은 전승한 이가 갖다 붙인 구절이니 믿을 만 하지 않다. 결국, 여자와 재물을 보내 오랑캐와 화친을 맺는 계책은, 이를 통해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근심때문에 뒤척이며 잠 못 이르는 지경에서도 벗어나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으니, 유경의 입안을 한고조가 사용해야 했던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자와 재물을 보내 화친하는 것은 끝내 한나라 정책의 선례가 되었으니 후세도 답습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가의는 말했다.


    “오랑캐가 조서를 보내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원래 주상께서 장악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자가 공물을 제공하는 것은 도리어 신하의 예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발이 위에 자리하고, 머리는 아래에 위치하는, 이렇게 거꾸로 매달린 형상을 아무도 해소하지 못하니 지금 나라에 인재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일시적인 계략이라고 할 지라도 수치스러운 일인데, 하물며 답습하여 선례로 만들어 버린 것이랴. 처음으로 무덤에 같이 묻을 인형을 빚은 자는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이 말의 출처는『맹자孟子』「양혜왕상梁惠王上」에서 인용된 공자의 “처음으로 무덤에 같이 묻을 인형을 빚은 자는 후손이 끊길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예전에는 권력자를 장사 지낼 때 다른 사람도 죽여서 묻는 순장 풍습이 있었다. 이에 어떤 이가 인형을 빚어 사람 대신 묻는 것을 고안했지만, 공자는 이 역시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였다. 여사면은 공자의 말을 인용해서, 비록 흉노에게 여자와 공물을 바치는 것이 임시 방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그러나 백성이 아직 전쟁이 일으킨 곤경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고, 안으로는 한고조로 하여금 잠 못 들게 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부의 정쟁이 외부의 모욕을 부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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