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에서 위:오:촉의 국력을 6:3:1로 보는 썰을 믿는 이가 정말 많다. 하지만 이 썰은 단지 국가 면적을 기준으로 판단한 것에 불과하다. 기실 위나라와 촉나라의 병력 동원 능력은 거진 비슷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위나라가 있던 북중국은 황건적 동탁의 전횡, 조조의 서주학살, 관도대전, 적벽대전으로 이미 수 많은 성인 남성들이 사망한 상태이지만, 유비가 근거지로 삼았던 익주는 전란의 겁화가 미치지 않은 몇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지>와 <한서-지리지>의 기록을 가지고 위의 가설을 검토하기로 했다.
<삼국지-장수전>을 보면 조조가 원담을 격파할 때 이미 전체 호구의 10%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삼국지-두기전>을 보면 이 상태가 조비때까지 계속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서-지리지> 에는 전한 전성기의 호구 수가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하기 직전까지 확보한 지역은 전한 전성기 때 호구가 900만 정도 되었다. 따라서 조조가 원담을 격파할 때 북중국의 호구는 90만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유비가 근거지로 삼았던 익주는 전란의 겁화가 미치지 않은 몇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많은 성인 남성들이 생존해 있었다. 예컨대 <삼국지-유장전>에서 인용한 <영웅기>에는 전란으로 관중지방과 남양지방에서 촉으로 수 만 가구가 이주해서 유장이 그들을 병사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지-방통전>에서 인용한 <구주춘추>에서는 익주의 호구가 백 만이라고 하였다.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한나라 전성기 촉나라의 호구는 93만이다. 이는 <구주춘추>에 기록된 익주의 호구수와 별 차이가 없으며, 따라서 삼국시대 촉나라의 호구수는 위나라보다 근소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이들이 위나라의 국력이 촉나라보다 월등히 강했다고 볼까? 이 근거는 <진서-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진무제 사마염이 오나라를 평정했을 때 진나라의 호구 수는 245만이었지만, 유비와 손권이 각각 황제를 칭했을 때 촉나라와 오나라의 호구수는 각각 20만과 52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까닭은 위에서 언급한 20만의 호구는 이릉전투에서 패배하기 이전의 통계이다. 만약에 <진서-지리지>의 기록이 타당하다면, 촉나라는 유비가 진입하기 전에 온갖 난리에 시달려 호구가 1/4로 급감한 상태여야 한다. 하지만 유비가 촉을 장악하기 이전, 이곳에서 큰 전쟁이 일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황건적의 활동무대도 북중국이었다. 따라서 유비가 유장에게서 촉나라를 빼앗았을 때 호구는 20만이 아니라 100만으로 추산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유비가 형주와 익주를 확보한 바로 그 때는 삼국지 최강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서-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전한 전성기 때 형주의 호구 수는 90만에 육박했었는데, 여기 역시 적벽대전 이전까지 전쟁의 참화를 덜 입었고, 채모가 고스란히 조조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전성기의 인구 규모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유비가 익주와 형주를 확보했을 때 확보한 호구는 200만에 못 미치며, 이는 조조의 두 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훗날 오나라에게 형주를 다시 빼앗기기는 하지만, 호구 수를 가지고 봤을 때, 제갈량이 익주의 국력만으로도 북벌이 가능하다고 출사표를 던진 것이 오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유비가 삼고초려 하면서 제갈량을 방문했을 때, 제갈량은 유방이 촉나라를 기반으로 항우를 격파한 고사를 들려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