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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Jul 14. 2019

여씨 일족, 한왕조 창업 최고 공신의 몰락

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여후는 한고조가 한미했을 때의 비妃이다. 효혜제와 딸 노원태후를 낳았다. 그런데 한고조가 한왕이 되자 정도지방에서 척희를 얻어 총애하였으며, 유여의를 낳았다. 효혜제는 사람됨이 인자하지만 연약했다. 한고조는 이를 보고 자신을 닮지 않았다고 여겨 항상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키고, 그 대신 척희의 아들 유여의를 세우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유여의가 자신을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척희도 총애를 받아 항상 한고조가 관동, 즉 함곡관 동쪽으로 행차할 때 따라갔는데,밤낮으로 울면서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워달라고 하였다. 한편 여후는 이미 나이가 많아 항상 궁궐을 지킬 뿐 자주 한고조를 만나지 못해 점차 관계가 소원해졌다. 유여의가 조왕의 후계자가 되면서, 거의 태자가 될 뻔 했던 적이 몇 번이나 되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이에 대해 간쟁하고, 장량도 계책을 세워, 태자는 폐위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대신들 가운데 태자 폐위에 대해 쟁론을 벌인 이는 바로 숙손통과 주창으로, 이들이 어찌 한고조 유방이 두려워 할 인물들인가? 그리고 아래에서 언급할 장량의 계책 역시 어린 아이의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사기》<유후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고조께서 태자를 폐위하려고 했다. 이에 여후는 건성후 여택을 시켜 장량에게 계책을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장량이 말했다. 


    “이는 입과 혀를 놀려 다투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주상께서 초빙하지 못하신  자가 천하에 네 명이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 금, 옥, 벽壁이라는 옥기, 비단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태자께서 공손한 말로 편지를 쓰시고, 아늑한 마차와 변론에 능한 선비를 보내셔서 간절히 청한다면 마땅히 올 것 입니다. 그들이 도착하면 손님으로 삼으시고, 때때로 태자와 같이 입조하도록 시키셔서, 주상으로 하여금 만나게 한다면 도움이 될 것 입니다. ” 


    이에 그 네 사람을 영접했다. 네 사람은 도착해서 건성후 여택의 손님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11년,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한고조 유방은 병이 들어 태자로 하여금 가서 격퇴하게 시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네 사람은 건성후 여택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태자께서 군사를 지휘해서 공을 세운다고 하더라도 지금 지위에 더할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오신다면 이 때문에 화를 입을 것입니다. 군께서는 왜 급히 여후께 기회를 봐서 주상께 울면서 이렇게 말씀을 드리도록 청하시지 않으시는지요. 경포는 천하의 맹장일 뿐만 아니라 용병술에도 능합니다.뿐만 아니라 지금 여러 장수들은 폐하의 예전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태자로 하여금 이 무리들을 거느리게 하는 것은 양으로 하여금 늑대를 이끌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누구도 명령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경포도 이 소식을 들으면 바로 북을 치며 서쪽으로 진군할 것입니다.”  


    여택은 즉시 밤에 여후를 만났다. 여후는 적절한 기회에 한고조에게 울면서 말했다. 이에 한고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 당시 장량은 병이 들었는데, 억지로 일어나 곡우에 도착해서 한고조를 뵙고 태자를 장수로 임명하여 관중지방의 병력을 감독하게 시키라고 말했다. 한고조 유방은 말했다. 

   

 “자방子房(장량의 자字)이 병에 결렸지만, 누워서라도 태자를 도와주려고 하는구려.”


    이 때 숙손통이 태부였지만, 이제 장량도 약간의 관련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고조 12년, 한고조는 경포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병이 더 깊어가면서 태자를 더 교체하고 싶어했다. 장량이 간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장량도 병을 핑계로 사무를 보지 않았다.숙손통도 고금의 사례를 인용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간쟁하였다. 그러나 한고조 유방은 그의 말을 듣는 척만 했지, 실제로는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한고조 유방은 연나라로 가서 주연을 열었다. 태자는 한고조의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저 네 명도 태자를 따라왔다. 나이는 모두 80여 세이었고, 긴 수염과 눈썹이 순백색이었으며, 의관이 심히 기괴했다. 한고조 유방은 이상하게 여겨 “저들은 무슨 일을 하는 자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네 명이 앞에 나가서 자신들의 성을 대답했으며, 각각 동원공, 녹리선생, 기리계, 그리고 하황공이라고 불렀다. 한고조 유방은 크게 놀랐다. 


    “내가 몇 해 동안 공들을 초빙하려 했지만, 공들은 나를 계속 피했소. 그런데 지금 공들을 어째서 내 자식과 같이 노니는 것이오?”


    네 사람이 모두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비를 가벼이 여기고 자주 욕하십니다. 하지만 신 등은 의를 추구하므로 모욕은 감수하지 못합니다. 이에 두려워 도망가 숨었습니다. 그런데 태자의 사람됨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남을 공격할 줄 알고, 선비를 아끼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 가운데 태자를 위해 목을 빼고 죽으려 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언뜻 들었습니다. 신들은 그래서 왔을 뿐입니다.”


    한고조가 말했다.


    “공들을 번거롭게 만들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태자를 가르치시고 보호해 주셨으니 참 다행이었습니다.”


    네 사람은 한고조의 장수를 기원하였고,의식을 마친 후 재빨리 떠나갔다. 한고조는 눈으로 그들을 전송하면서 척부인을 불러 그 네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태자를 바꾸고 싶었지만, 이미 저 네 사람이 그를 보좌하고 있으니, 이미 날개가 다 자란 셈이오. 일은 어렵겠소. 여후가 진정한 주인이 될 것이오.”


    척희는 한고조 유방이 한왕이 된 후에야 맞아들인 이이다. 한고조 유방이 스스로 한왕이 된 이후 붕어할 때까지 십 년이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유여의, 즉 척희의 아들이 아주 일찍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고조 말년에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니, 한고조가 어찌 그가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한나라 때부터 전승된 소위 《여후이야기》는 거의 모두 황당한 거짓이며 실제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외척에게 의존하는 것이 바로 당시 분위기였다. 따라서 권력을 맡길 이가 여후말고는 누가 있겠는가? 장량이 동원공등 사호를 초빙한 일도, 어린애 장난과도 같으니, 역사서에서 전승한 장량의 아들 장벽강이 승상 진평을 설득시켜 여씨로 하여금 남북군을 장악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신뢰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장량이 여씨의 파당에 속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한고조가 황제가 된 이후, 사방을 정벌하고 토벌했기 때문에 항상 근거지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에 신임할 수 있는 자를 머물러 지키게 했는데, 소하만큼 마땅한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그도 결박당해 죄수 신분의 노예가 된 적이 있었다. 이에 관해 《사기》<소상국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고조11년,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고조는 스스로 장수가 되어 한단에 도착했다. 진압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회음후 한신이 주멸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사신을 보내 승상 소하를 상국으로 삼고, 식읍5000호를 더 올려주었으며, 병사500명과 도위 한 명으로 하여금 상국위가 되도록 명령하였다. 여러 군君들이 모두 와서 축하했지만, 소평이라는 자만 조의를 올리며 말했다

    “화가 지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상께서 밖에서 이슬을 맞으며 고생하셨지만, 군께서는 안에서 지키기만 해서 화살과 돌을 맞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군에게 식읍을 늘려주시고 호위대까지 설치해주신 것은, 오늘 회음후 한신같은 자가 안에서 새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그대의 마음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즉, 호위대를 설치하여 군을 지키는 까닭은 그대를 총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따라서 군께서는 식읍을 사양하여 받지 마시고 오히려 집안의 재산을 다 써서 군비에 보태시면, 주상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소하는 그 계책을 따랐고, 한고조는 크게 기뻐하였다. 한고조 12년 가을,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한고조는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수차례 보내 소하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소하는 한고조가 군중에 있으니 자신은 백성들을 안무하고 격려하여 진희의 반란 때처럼 군사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소하의 한 손님이 그를 설득했다.


    “군이 멸족당할 것이 머지 않았습니다. 군의 지위는 상국이며, 공로도 이미 으뜸이니, 여기서 더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군께서 관중에 들어오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얻은 지 이미 십 여 년이 되었으며, 이제 군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다시 백성들의 화합이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주상께서 군께 여러 번 물으신 것은 그대가 관중에서 동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밭을 많이 싼 값에 사들이신 뒤 임대하여 스스로를 더럽혀서 주상을 안심시키는 것이 어떠신지요.”


    이에 소하는 그 계책을 따랐다. 한고조 유방은 크게 기뻐하였다. 한고조 유방이 경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오는데, 백성들이 길을 막고 편지를 올렸다. 상국 소하가 싼 값에, 강압적인 방식으로 백성들의 땅과 집을 수 천 만 씩이나 사들였다고 하였다. 도착하니 상국 소하가 배알하였다. 한고조 유방은 웃으면서 말했다. 

    

    “상국이란 백성들을 이롭게 하는 자리가 아니오?”


    백성들이 올린 편지를 모두 소하에게 건네주면서 말했다. 

    

    “군이 직접 백성들에게 잘못했다고 하시오.”

    

    이에 소하는 백성들을 위해 한고조 유방에게 부탁하였다.

    

    “장안의 땅이 좁습니다만, 상림에 버려진 빈 땅이 많이 있습니다. 이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곳으로 들어가 밭을 일구게 하시고, 건초를 세금으로 거두어 짐승들에게 먹이는 일을 중지해주십시오.”

    

    한고조 유방은 크게 화를 내었다. 

    

    “상국은 상인들의 재물들을 많이 얻었는데,이제 와서 내 소유의 동산을 요청한단 말인가?”


     이에 소하를 정위에게 보내 결박시켜버렸다. 수 일 후, 왕위위의 말 덕분에 사면되어 나왔다. 소하는 홀연히 전 재산을 군비에 충당하는데 사용하고, 갑자기 싼 값에 밭을 매입하여 소작을 경영하고, 백성들이 올린 편지를 받자 또 그들을 위해서 상림원의 비어있는 땅을 요청했다. 이러한 행동들이 어찌 의심을 사지 않을 수 있겠는가?또한 정말로 싼 값에 백성들의 밭과 집을 매입한 것이 수 천 만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한고조 유방이 비록 내치에 어둡다고 하더라도, 어찌 가만히 내버려 두고 묻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하는 문신으로 한고조 유방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공을 논할 때 소하를 제일 높게 쳐 준 것은 바로 무신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였을 뿐이다. 그러므로,소하가 관중에서 가벼이 행동할지도 모르는 것을 무슨 걱정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아마도 소하가 결박했다는 이야기도 책사들이 꾸며낸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하가 정말 무슨 일로 결박당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이 거짓으로 창작된 것이 아니라면, 남을 모욕하는데 소질이 있는 한고조 유방의 경박한 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의 시기, 천명을 받은 이를 보좌하는 신하들 가운데, 수풀과 늪에서 봉기했던 이들은 대다수가 난리를 벌이고 세상을 뒤집어 버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본디 귀족이었던 이들은 항상 안정된 것을 즐겼으며, 하늘과 늪의 차이를 엄격하게 따졌으니, 이는 그들의 습관에서 기인한 것이다. 진평과 주발은 끝내 윗사람을 폐위하고 시해했지만, 장량은 태자를 보좌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무신 중에는 여후의 첫째 형 주여후, 둘째 형 건성후, 무양후 번쾌가 있고, 문신 가운데는, 장량, 숙손통, 주창 등이 있는데, 이들이 도움을 줄 수 있으니, 태자의 지위는 본디 쉽게 동요될 수 있지는 않았을 것이니, 입과 혓바닥을 놀려 논쟁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설명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한고조 유방은 팽성에서 대패하면서 효혜제와 노원공주를 밀어 떨어뜨렸었다. 그리고 그가 광무라는 곳에서 군대를 주둔하자, 항우가 높은 도마를 설치하고, 유방의 아버지를 그 위에 둔 뒤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의 아버님을 삶아버릴 것이다.”


    한고조 유방은 대답했다. 


    “나와 항우는 형제가 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내 애비는 곧 너의 애비이다. 니 애비를 반드시 삶아야 하겠으면, 나에게 국 한 그릇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


    유방의 잔인함이 이 정도이니, 설마 여후가 그와 같이 힘든 일을 하고 아무 맛이 없는 음식을 먹어온 것을 생각해서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인가? 여후가 붕어한 뒤, 혜제의 자손도 없는 상태에서, 유여의를 황제로 세웠다면, 하루라도 그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을까? 여후의 아버지는 여공으로 패현 현령의 중요한 손님이었다. 여후의 두 형은 모두 장수가 되었고, 매제인 번쾌는 원래 한고조 유방과 같이 무명이었을 때부터 따라나섰다. 따라서 여씨와 친한 당파는 모두 당시의 호걸이었으며, 한고조 유방이 창업했을 때 앞서거니 뒷서거니 바삐 달려다녔음을 알 수 있다. 진평과 주발등이 “한고조 유방께서 천하를 평정하시고 자제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지금은 여후가 황제의 명령인 제를 내리고, 형제들과 여러 여씨 일족들을 왕으로 삼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했는데, 이는 기실 진평의 말일 뿐이다. 역기가 여록에게 “유씨가 왕을 아홉 세우고, 여씨가 왕을 셋 세웠는데, 모두 대신의 논의에 따른 것이었다. 일이 끝나고 제후들에게 포고했으며, 제후들도 모두 마땅하다고 여겼다”라고 했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실제 정황이다. 


    《사기》<여후본기> 에서는 효혜제가 붕어하고, 장량의 아들 장벽강이 승상에게 여대, 여산, 여록을 장수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남북군에 머물도록 설득했으며, 여씨의 권력이 이 때부터 일어났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 이 말대로라면, 어찌 계속 주발이 태위로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산과 여록이 남북군에 머문 것은 여후가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의 일이고, 설사 그녀가 여씨들을 왕으로 봉했다고 하더라도 황제의 명령인 제를 내리기 시작한 그 해의 일이니, 아마도 이는 어린 황제의 나이가 아직 어려 외척의 힘을 빌려 곁에서 보좌하기 위해서 일 것이며, 결국 유씨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게 되었을 것이다. 즉, 여씨의 원래 의도는 한왕조 종실과 공신의 임무을 다하는 데 있었다.


    《사기》<여후본기> 에는 아래와 같이 여씨일족의 패망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여후는 임종 전 자신의 조카인 여록과 여산에게 경고하였다.


    “한고조가 천하를 평정한 뒤 대신들과 맹약하였었다. 유씨가 아닌데 왕이 된 자는 천하가 함께 공격할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여씨가 왕이 되었으니 대신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다. 내가 죽으면 황제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대신들이 변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반드시 군대를 장악하여 황궁을 호위하라. 출상하는데 따라가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황제의 명령인 제를 내리게 해서는 안 된다.”


    여씨 일족은 정사를 보고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으며, 반란을 일으키고 싶어했지만, 한고조의 옛 대신 주발과 관영 등을 두려워해서 감히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그런데 제왕 유양의 동생, 주허후 유장의 아내는 여록의 딸이었다. 덕분에, 은밀히 여씨 일족의 음모를 알았으며, 주멸을 당할까 두려워했다. 이에 유장은 몰래 사람을 시켜 제왕에게 알려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군시켜 여씨를 주멸하고 그를 황제로 옹립시키고자 하였다. 제왕은 상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진군했다. 상국 여산등은 회음후 관영으로 하여금 병력을 거느리고 공격하게 시켰다. 관영이 형양에 도착하자, 제왕과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 서로 연합한 뒤 여씨에게 변고가 생길 때를 기다려 함께 주멸하자고 알렸다. 제왕이 이를 듣고 병력을 제나라 서쪽 국경로 물려 약조를 기다렸다. 여록과 여산은 관중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안으로는 강후 주발과 주허후 유장 등을 걱정했고, 밖으로는 제나라와 초나라 병사들을 두려워했으며, 또한 관영도 그들을 배반할까 무서워했다.이에 관영의 군대와 제나라 군대가 부딪혔을 때를 노려 군사를 일으키려고만 했으나, 우물쭈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장안에는  여씨 일족의 사람들로 가득해서, 열후와 여러 신하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다할 수 없었다. 태위인 강후 주발도 군대 안으로 들어가 군사들을 관장하지 못했다. 그런데 곡주후 역상의 아들 역기가 여록과 친하게 지냈다. 이에 강후 주발과 승상 진평이 모의를 해서 사람을 시켜 역상을 겁박하여 그 아들 역기로 하여금 여록을 속이라고 시켰다. 


    “한고조와 여후가 함께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유씨가 세운 왕은 아홉이고, 여씨가 세운 왕은 셋인데, 이는 모두 대신들의 의논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제후들에게도 포고된 바이니 그들도 이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태후께서 붕어하시고 황제는 어립니다. 그런데 족하께서는 조왕의 인수를 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급히 그대의 나라로 가서 변경을 수비하지 않으시고 상장군이 되셨습니다. 장군이 여기에 머문다면 대신과 제후들의 의심을 사게 됩니다. 족하께서는 어찌 장군의 인수를 돌려주어 병권에 태위에게 귀속되도록 하지 않으시는지요. 이렇게 하신다면, 제나라 군대는 해산할 것이고, 대신들은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족하도 베개를 높이 베고 사방 천리가 되는 땅에서 왕노릇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만세의 이익일 것입니다.”    


    여록은 그 계책을 그럴 듯 하게 여겼다. 이에 사람을 시켜 여산과 여씨 일족들의 노인들에게 보고하였는데, 어떤 이는 이로울 것이다고 하고, 어떤 이는 불리할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그 계책의 가부에 대해 주저하여 아무 결정이 나지 않았다. 


    8월 경신일 아침, 평양후 조줄이 어사대부로서 상국인 여산을 만나 국정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때 낭중령 가수가 보낸 사자도 제나라에서 와서 여산에게 관영이 제나라와 초나라와 합종을 해서 여씨 일족을 주멸하려 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빨리 입궁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런데 평양후 조줄이 이 말을 몰래 듣고 바로 달려가서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에게 알렸다. 이에 태위 주발은 북군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당시 양평후 기통이 항상 부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부절을 빌려서 북군으로 들어갔다. 태위 주발은 다시 역기와 전객 유게에게 여록에게 먼저 가서 설득시키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께서 태위로 하여금 북군을 지키게 하셨으며, 족하는 그대의 나라로 가시는 것을 바라십니다. 급히 장군의 인수를 반환하고 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여록은 역기가 자신을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고, 인수를 풀어 전객 유게에게 넘겨서 병권을 태위에게 건네주도록 하였다. 태위 주발은 장군의 인수를 들고 군문으로 들어가서 명령을 내렸다. 


    “여씨를 위한다면 오른팔을 걷고, 유씨를 위한다면 왼팔을 걷어라.”


    군사들은 모두 왼팔을 걷어 유씨를 위한다고 하였다. 즉, 태위 주발이 북군에 도착했을 때, 여록이 상장군의 인수를 풀고 떠났기 때문에, 그 부대를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군이 남아있었다. 평양후 조줄은 태위 주발이 북군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산의 음모를 승상 진평에게 알렸다. 승상 진평은 주허후 유장을 불러 태위 주발을 보좌케 시켰다. 태위 주발은 주허후에게 군문을 감시하라고 명령하였으며, 평양후 조줄을 시켜 위위에게 통지했다.


    “상국 여산이 전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여산은 여록이 이미 북군을 떠났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미앙궁으로 들어가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전전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으니 주위를 배회하며 돌아다녔다. 평양후 조줄은 아마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하면서, 태위 주발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태위 주발 역시 아직 여씨 일족에게 승리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들을 주멸하겠다고 아직 감히 대놓고 말할 수 없었다. 이에 주허후 유장을 보내면서 말했다. 


    “급히 입궁해서 황제를 지키시오.”


    주허후 유장은 태위 주발에게 병력을 요청했다. 태위 주발은 천 여 명의 병졸을 건네주었다. 주허후 유장이 미앙궁 안으로 들어가자 마자 여산을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 해질 무렵이 되자 유장은 여산을 습격하였다. 여산은 도망쳤지만, 바로 쫓겨 살해당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부대를 나누어 여러 여씨 일족을 모두 체포하였으며,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베었다. 


     여씨의 패망은 그들이 한왕조 종실과 공신을 전멸시킬 계획을 세우지 않고, 국정을 장악할 때 단지 군대만 확보하면 튼튼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빨과 발톱으로 쓸 심복이 없었는데, 제나라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사신으로 보낼 심복조차 없어서 이를 관영에게 맡겼다. 이에 안과 밖으로 곤란이 겹치니 부득이하게 역기의 계책을 듣고자 하였다. 만약에 여씨가 애초에 유씨를 위태롭게 할 계획을 세웠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그리고 여산과 여록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도 무고이다. 여산과 여록이 정말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다면, 여록이 어찌 군대를 떠날 수 있었으며, 설사 떠나더라도 여산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여산이 맨손으로 미앙궁에 들어간 것이 과연 무엇을 하기 위함이었을까? 따라서 한나라 때 전해진 여후 관련 사건들은 모두 실제 기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여러 대신들의 황제 폐립을 음모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으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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