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의 가면을 쓴 한나라 때의 상인들.
2011년 발표한 논문《<염철론>으로 본 겉과 속이 다른 억상정책》의 내용을 요약 수정한 글입니다.
중국사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하지 못한 까닭 가운데 하나로 유교사상에서 기인한 중농억상 정책을 꼽는 이들이 상당하다. 물론 모든 왕조에서 상업을 억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나라 시대에는 정부가 발벗고 나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그냥 그것이 진리라고 받아들여졌기 때문일까? 아니다. 중농억상 정책 시행에 대한 불꽃튀는 토론이 있었다. 바로 전한 소제昭帝 때의 염철회의鹽鐵會議에서 말이다. 한무제漢武帝는 흉노족을 격파하고 서역을 개척하여 중국사에서 가장 이름난 황제 가운데 한 명이 되었지만, 이에 너무 많은 경비를 소비했기 때문에 경제가 파탄나서, 자연 재해가 일어나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잡아 먹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한무제가 붕어한 뒤 즉위한 한소제漢昭帝는 지방 군국의 현량문학賢良文學들을 소집하여 백성들이 무엇을 힘들어 하는지 청취했다. 이 회의를 가리켜 후세 사람들은 염철회의라고 불렀다. 현량문학들은 모두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을 철폐하며, 농업을 진흥하고 상업을 억제해서,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일을 줄여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桑弘羊은 국가가 상기 정책들을 시행해서 나오는 수익을 변경을 안정시키는 데 사용하기 때문에 폐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개의 중국사 개설서에서는 한무제는 걸출한 경제 실무자인 상홍양이 실시한 염철전매제와 균수법 덕분에 경제를 안정시켰으며, 현량문학들은 경제에 어두운 유학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의 실행 현장과 현량문학, 그리고 상홍양의 출신을 알게 된다면 어딘가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은 국가가 상업을 장악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으로, 관치 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염철전매제는 말 그대로 국가가 소금과 철을 전매하는 제도이다. 균수법은 먼 지방에서 특산물같은 것을 공납할 때 중앙에 직접 운송하지 않고, 중간 집적지를 만들어 보관하게 했던 제도이며,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예컨대 산동 지방에서 난 곡식을 바로 황궁이 있던 관중지방으로 보내기 전에 두 지역의 곡식 가격 추이를 지켜보다가, 산동지방의 곡식 가격이 싸면 낙양에서 수매해서 저장했다가, 관중 지방의 곡식 가격이 비쌀 때 되파는 정책이라고 한다. 표면상으로는, 대부분 중국사 개설서 말대로 아무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현량 문학들은 국가가 소금과 철을 전매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질이 떨어지는 것만 겨우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균수법을 빌미로 곡식등을 독점해서 물가가 앙등하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에 염철회의의 회의록인 《염철론》에 표점을 찍고 주석을 단 왕리치王利器에 의하면, 현량문학은 지방 유지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이며, 상홍양의 정치적 라이벌인 곽광의 대변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현량문학의 염철전매제, 균수법에 대한 비판이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그들이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해 당시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모습에서 설득력을 상실한다. 예컨대 설령 곽광이 현량 문학의 정치적 후원자였다고 하더라도, 현량문학은 곽광이 강제로 국가의 토지를 점유해서 소작 놓은 일을 비판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현량문학들이 본디 경제적 하층 계급 출신 이익이었다. 전한과 후한 시대를 통털어 삼십 차례 현량을 뽑았으며 그 수는 총 이 천 명 이상이 되는데, 그 대다수가 성만 기록되었을 뿐이며, 이는 그들의 출신이 한미했음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상홍양도 현량문학을 가리켜 밭도랑과 빈곤한 거리에서 나와 쌀겨나 먹는 이들이라고 조소했다. 예전에 현량문학으로 정부에게 초빙된 지식인들은 한문제 때 가의나 조조처럼 자신의 웅지를 펼칠 수 있는 어느 정도 높은 지위가 주어지는데, 이번 만큼은 아무도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심지어 이름조차도 역사에 남기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한무제가 염철정책을 실시한 직후, 제나라 상이었던 복식卜式도 현량문학이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이 야기한 문제점을 그대로 언급하면서, 이 때문에 근래 심각한 가뭄이 들었으며, 이에 상홍양을 삶아 죽여서 하늘의 분노를 풀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따라서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의 폐단은 실시 직후 부터 발생했다고 봐도 무방하며, 이에 대한 현량 문학의 비판도 사실 무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이 정책 자체는 그럴 듯해도 사방에서 이 때문에 원성이 자자했던 까닭은, 시행 과정에서 정경유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사대부 상홍양은 원래 상인의 아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염철전매제의 시행 실무자인 동곽함양과 공근도 소금과 제철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었다. 소금과 제철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국가가 자신들의 밥그릇을 빼앗는 염철전매정책에 적극 찬성할 뿐만 아니라 실무자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삼성 이재용이 기재부 장관을 역임했다는 소리이다. 따라서 정부가 물자를 독점해서 얻는 이익의 상당량을 상홍양이 편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상홍양이 정부 관료가 된 뒤 같은 상인들의 이익을 억제하고 국가의 부를 제고하는데 전력을 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료에서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의리와 우애는 사라지고 오로지 돈 벌기에만 혈안이 되었다고 묘사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무제의 대외정책이 불러일으킨 재정고갈은 매관매직을 일상화시켰기 때문이다. 즉, 누구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 만 벌면 관직을 차지해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소리이다. 하지만 많은 중국사 개설서에서 염철전매제와 균수법은 지방 상인의 이윤 획득의 억제를 통해 중앙 정부의 재정을 확충을 도모한 훌륭한 정책이며, 현량문학의 비판은 상업을 악마화하는 유교적 이데올로기에서 영향을 받은 정치투쟁의 일환이라고만 서술하고 있다.
전한시대에는 상인들은 억압하자는 주장과 정책이 계속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에 상인들은 관직을 사서 관료 계층으로 정체를 탈바꿈할 수 있었다. 예컨대 상인은 누구나 기피하는 변경 지방 수비병으로 차출되는 1순위였으며, 심지어 한무제 때는 고민령이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재산 신고를 정확히 하지 않으면 그냥 통채로 몰수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상홍양의 사례처럼 관료가 된다면 이런 겁화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상홍양의 아들 상천은 당대의 유명한 유학자로 손꼽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상인이 스스로 상인의 딱지를 떼고 관료로서 활동하기 시작한다고 해서, 상업에 종사하는 일을 아예 포기했을까? 아마 관료의 가면은 상업 활동에 도움을 주면 주었지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후세 우리들은 한나라 시기 사료에서 상인의 활동이 별로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소위 유교 이데올로기에 빠져 상업이 사회에 주는 혜택을 깨닫지 못하고 억압하기만 했다고 이해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첨언하자면, 진시황 전국 통일 이전만 하더라도 유가는 법가에 비하면 중상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