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면의 《진한사》 번역 프로젝트
『한서』「경제기찬」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옛 주나라와 진나라의 폐단은 법망이 주밀하고, 문서 관리는 엄격했지만, 간사한 이들이 득세하지 못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번거로운 것들을 일소하고 백성들과 휴식을 취했다. 효문제 때 이르러 공손하고 검약하는 태도까지 더했으며, 효경제는 이를 준수했다. 이에 오륙십 년 동안 사회 분위기가 변해서 백성들이 순수해지고 정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주나라는 성왕成王, 강왕康王에 대해 말하고, 한나라는 문제와 경제를 언급했는데, 참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나 지극한 칭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응소의『풍속통의風俗通義』에서 말하기를, 한성제漢成帝가 유향劉向에게 세속에서 전해지는 한문제의 업적에 대해 물었는데, 유향은 그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문제가 비록 절검했지만, 궁궐인 미앙전전未央前殿은 너무나 사치스러웠습니다. 문양들을 조각한 뒤 다섯 색깔로 그림을 그리고, 지붕 서까래는 옥으로, 복도까지 황금으로 장식했으니, 그 성세가 고작 책싸개로 휘장을 만들었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문제께서 즉위하고 10여년 동안 오곡 농사가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풍족하게 지내고, 창고는 꽉 차서, 비축분이 넉넉했습니다. 하지만 한문제는 본디 황로의 주장을 배우고, 유학적 정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통치에서도 청정무위를 숭상하여 옛 예악과 학교를 복구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습속이 크게 교화될 수 없었으며, 그저 배만 부르고 풍족한 수입만을 누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후 흉노가 몇 차례 변경 요새를 침범하고, 깊이 들어와 노략질을 했습니다.이에 북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투에 대비하였으며,군수 물자의 보급도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시기, 공교롭게도 곡식 수확이 예년 수준을 밑돌았습니다. 백성들은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곡식 수매가도 1 석당500전으로 고정시키고 한 푼도 올리지 못하게 시켰습니다.
물론 전대조前待詔 가연지賈捐之가 한원제漢元帝께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문제 당시 백성들은 인두세를 40전만 내었고, 형사 사건도 사 백 여 건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태종 때를 살펴보면 백성들은 거듭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당시 통치는 한선제漢宣帝의 시대를 능가할 수 없었습니다. 한선제 지절地節 원년, 천하의 형사 사건이 47000여 건이나 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연지의 말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뿐만 아니라 한문제 때의 정치에도 잘못이 자못 많았습니다. 태중대부太中大夫 등통鄧通은 한문제 총애를 받는 신하로, 황제의 악성 종기에서 나는 고름을 빨아서, 가까운 친척에 비견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으며, 촉군蜀郡의 동광산까지 사여받아 동전을 주조할 수 있었습니다. 유통되는 등통 개인의 재산이 왕자나 분봉받은 군주에 버금갔습니다. 한문제께서도 직접 은밀히 밖으로 나와 등통의 집으로 수차례 행차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문제께서는 양 털로 짠 옷을 입고, 양 털을 압착해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준마에 오르신 뒤, 시종, 가까운 신하, 상시常侍,기문期門,무기武騎 등과 점대漸臺 아래에서 말을 타고 여우와 토끼를 활로 쏘았으며, 한 손 그물을 던져 꿩을 잡고, 돼지를 찔렀습니다. 당시 대조 가산賈山이 한문제께 군국의 현량들과 밖에서 노닐며 사냥을 수차례 즐긴 것은 마땅치 않다고 간언했었고, 태중대부 가의도 이에 대해 수차례 진언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가의는 등통과 함께 시중으로서 함께 같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가의는 등통의 사람됨을 싫어해서 수차례 그를 비난했고 이 때문에 서로 소원해졌으며, 결국 장사왕의 대부[長沙大夫]로 쫓겨났습니다. 가의는 임지로 갔지만 내심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상수湘水를 건너면서 제문을 던졌습니다.
‘다락문과 잡초처럼 천한 것들이 존귀해지고 유명해지며, 아첨을 일삼아 총애를 받은 이들이 뜻을 이루니, 굴원이 사악한 말들에 참소를 당한 것을 애도하려 하네. 그리고 나 역시도 등통에 의해 헐뜯어져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라네.’
이에 한성제가 말했다.
“천하를 통치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선제와 비교하면 어떤가?”
유향이 말했다.
“한선제의 시대에는, 정치와 가르침이 명확하고, 법령이 제대로 시행되었습니다. 또한 변경이 안전했고, 주변의 오랑캐들과도 친교를 맺었을 뿐만 아니라, 흉노의 선우마저 요새의 문을 두드려 귀순했습니다. 천하는 부유해졌고 백성들은 무탈하고 즐거움도 누렸습니다. 아마 당시의 치세는 태종의 때보다 나을 것입니다. 또한 흉노도 복속해와서 주변의 오랑캐들과도 화친을 이룬 것을 생각하면 말입니다.”
한성제가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는 모두 한문제께서 천하를 태평스러울 정도로 다스려서, 그 덕이 주성왕周成王에 비견될
정도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말은 어디서 생겨난 것이오?”
유향이 대답했다.
“사업에 관해 의견을 받는 과정에서 생겨났습니다. 한문제께서는 사업에 대해 의견을 개진하는 자를 예로 대하셨기 때문에, 그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낮은 자리에 있든 높은 자리에 있든 한문제께 와서 얼굴을 펴고 편히 말했으며, 한문제께서도 가마를 멈추고 들었습니다. 그 의견이 그럴 듯 하면 훌륭하다고 칭찬하셨으며, 그렇지 않으면 기쁜 듯 웃기만 하셨습니다. 이에 의견을 제시했던 많은 이들이 한문제를 찬미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남긴 글만을 볼 수 밖에 없었으며, 그것이 다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실체를 살피는 자는 적고, 소리를 따르는 자는 많으니, 가끔씩 없는 일도 억지로 만들어졌습니다. 물론 한문제께서는 절약과 검소를 통해 스스로를 통제하시어 천하의 모범이 되셨으며, 여러 의견에 대해서도 용인할 때도 신하들의 단점을 뱉지않고 목구멍 속으로 삼켜 넘기셨으니, 이는 세상 이치에 통달한 사람들은 미치기 어려운 것이니 아마 한선제보다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총명함과 원대한 식견, 수 십 년의 일들을 잊지 않는 것, 수 만 가지의 정무를 관장하는 능력, 천부적인 통치 능력은 아마 한선제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러므로 한문제는 중간 정도의 능력을 가진 군주에 불과했다. 비록 공손하고 검소하다는 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잘 실천에 옮긴 군주들도 많다. 전한시대의 다른 황제를 가지고 논하자면, 한원제의 관대함과 인자함은 결코 한문제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그가 석현石顯에게 정사를 맡겼을 때도 한문제가 등통을 총애한 것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한문제와 한경제의 지극히 훌륭한 통치는 아마도 시대의 부름에 맞아떨어져 가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왕충王充의『논형論衡』「치기治期」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세상에서는 옛날의 군주들은 현명해서 도덕이 시행되었고, 도덕이 시행되니 공적이 이루어지고, 정치가 안녕해졌다고 말한다. 반면에 군주가 불초하면 도덕이 무뎌지다가 폐기되고, 도덕이 무뎌지다가 폐기되면, 공적이 훼멸되고 통치도 엉망이 된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논자들 가운데 이 말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이가 없다. 왜냐? 요堯와 순堯의 현명하고 성스러움이 태평을 이룩하고, 걸桀과 주紂의 무도함이 난리를 일으켜 주멸당한 것만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대로 논하자면, 이는 세상의 명운이 이끈 자연스러운 결과이지, 도덕성 여부가 일으킨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