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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May 25. 2018

진시황의 전국 순행과 불완전했던 중앙 권력

    전한 초 문제시기 사람인 가의賈誼가 지은 《과진론過秦論》은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가 흥기하고 멸망한 과정과 이유를 분석한 짧은 글로, 진나라가 멸망한지 오십 년도 채 되지 않아 쓰여졌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작성한 역사 기록물로 볼 수 있습니다.《과진론》에 따르면 진나라는 관중關中지방, 즉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이라는 산으로 가로막힌 천혜의 요새에 기틀을 잡은 후, 각국에서 인재들을 영입하고 부국강병에 힘써다고 합니다. 이에 동방의 여섯 제후국들은 뛰어난 인재들로 하여금 백만대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관문인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오히려 진나라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그의 통일 왕조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기라성같은 인재들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진섭陈涉이 고작 죽창을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산동 호걸들이 호응하였으며, 결국 진은 멸망했습니다. 요컨대, 전국시대 제후국들에 비하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보잘것 없는 이들이 그 때 보다도 더욱 강력해진 진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거지요.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가의는 이에 적국을 정복하는 일과 정복한 나라들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도리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으며, 설사 진시황이 은과 주의 역사를 참고해서 통일 중국을 다스렸다면 나중에 비록 우둔한 군주가 나라를 다스린다고 하더라도 대업을 길이 보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시말해, 진시황이 우둔한 군주는 아니더라도 그의 통치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것입니다. 

       、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여러 신하들은 연燕, 제齊, 초楚의 경우 관중지방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왕을 세워 자치를 시키자고 건의했지만, 이사李斯는 군현을 세워 중앙이 직접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진시황은 이사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중앙정부가 지방을 직접 통치하는 군현제라는 제도는 전국시대 중기부터 이미 각 제후국에서 선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리 색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전 중국으로 확대시키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과연 진의 중앙정부가 이를 시행할 역량이 있었을까요? 현재 많은 학자들은 진한시대 황제들은 제후들의 힘을 빌리지 않고 모든 인민을 직접 개별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고 믿으며, 근래 출토된 율령과 장부등의 문헌들은 이 학설에 힘을 더욱 실어주었습니다. 소위 “진한제국”이라는 개념은 중국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급할 수 있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의는《과진론》에서 이사의 군현제 확대 실시를 진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하였습니다. 한문제를 도와 한 초의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는 계책을 내놓은 그가 군현제의 확대 실시 때문에 진나라가 망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주장은 전한시기 황제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한무제漢武帝 시대를 산 사마천도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말미에 따로 채록할 만큼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즉 섬서성 정도면 몰라도, 중국 전역에 진시황이 군현제를 확대 실시하는 것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당시의 유능한 관료와 천추에 길이남을 역사학자가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한시대 통치 제도에 대해서 어느 쪽 주장이 더욱 타당할까요? 출토문헌이라는 날 자료를 근거로 황제가 전 인민들을 직접 지배했다는 진한제국 개념을 공고히 한 현대 학자들일까요? 아니면 진시황의 중앙 집권 체제의 확대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근 사십 년이 지난 후에도 실현 가능성이 적다고 본 가의일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진시황이 중국 통일 후 어떤 사업을 벌였는지가 기록된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의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전 중국에 확대 실시한 이후 거의 순수, 즉 직접 정복한 땅을 돌아보는 일만 했다고 합니다. 


진시황 27년: 농서隴西, 북지北地 등을 순수하다.


진시황 28년: 태산泰山에 오르다.


진시황 29년: 동쪽으로 유람하다.


진시황 32년: 연燕 지방을 둘러보다.


진시황 37년: 초楚와 오吳 지방을 둘러보고, 다시 산동지방으로 행차하던 중 사망하다.  


    그렇다면 왜 진시황은 이렇게 자주 순행을 나섰을까요. 이에 대한 단서를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황제의 영명함으로 사방을 순찰하기 시작했다. 존귀하고 비천한 이들 모두 자신의 등급을 넘어서는 일이 없었고, 간사한 일들은 용납되지 않았기에 모두 충성을 다했다. 크고 작은 일 모두 진력으로 수행했으며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가깝거나 멀거나 상관없이 외지고 숨겨진 지역에서도 모두 엄격하게 일을 진행했다.” (진시황 28년 낭야대琅邪台 송덕비)


    “(진시황이 죽은 뒤) 이세二世황제는 조고趙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의 나이가 어리고, 처음 즉위해서, 백성들이 아직 우러러 복종하지 않는다. 진시황께서는 군현을 순행하셔서 강함과 위엄을 보여주어 전 중국을 복종시키셨다. 그런데 지금 느긋하게 순행을 떠나지 않으면 약하게 여겨져 신하들이 천하를 관리하지 못할 것 같다’ 

     봄에 이세황제는 동쪽의 군현으로 갔으며, 이사도 따라갔다."


    즉, 진시황이 순수에 나선 까닭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신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는지 파악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29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유람을 떠났다. 양무陽武의 박랑사博狼沙에서 도적떼의 습격에 놀랐다. 체포하는 데 실패하자 전국에 열흘 동안 수색령을 내리다.”(진시황 29년)


    동쪽으로 순수를 떠난 진시황은 도적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왜 굳이 산동반도가 아니라 전 중국에 수색령을 내렸을까요. 어쩌면 이 역시 자신의 명령이 전 중국에 제대로 시행되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기-진시황본기》 에 따르면 진시황은 시황 33년부터 36년까지 순수를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 새로 정복한 지역에서 진시황의 명령이 항상 관철되지 않았음을 시사해주는 일화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시황 34년 제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은 군현제의 확대 실시는 옛 정치제도와 다르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이사는 저 어리석은 유생들은 시대가 바뀐 줄 모르고 옛 것을 고집한다고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백성들을 선동할 수도 있으니 개인이 소장한 학술서적들은 모두 불태우고 오직 정부에서만 이것들을 관리해야 하며, 관리만이 백성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반론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분서사건이 벌어진 계기입니다. 이후 중국의 학술은 크게 쇠퇴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황제의 개별 인신 지배가 가능했던 증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청신의 군현제 폐지 주장은 당시 유학이 가장 성행했던 산동지방의 여론을 대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사의 반응 역시 많은 지역에서 진시황의 명령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진시황이 많은 방사와 유생들을 생매장 한 것을 본 맏아들 부소夫蘇 역시 천하의 백성들이 아직 하나로 모이지 않았으며 아직도 공자의 학술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고 진언했지만, 섬서성 북쪽의 상군上郡으로 쫓겨났습니다. 시황 36년 동군東郡 지역에 떨어진 운석에 어떤 백성이 진시황이 죽고 나라가 분열될 것이라는 글귀가 새겼다가 근처에 살던 이들이 몰살당했습니다.


    물론 아래처럼 진시황의 명령이 중국의 가장 변경까지 전달되고 시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도 있다. 


"진시황 33년, 범죄자 등을 계림桂林이나 남해군南海軍 등의 변경으로 보내 보초를 서게 했다. “


“진시황 34년, 범죄를 엄정하게 다루지 못한 관리들을 만리장성 축조공사나 남월南越 지방으로 보냈다.”


“진시황 35년, 궁형이나 유배형을 받은 70여 만 명을 아방궁과 여산 건설에 투입하다.”


    전국 각지에서 범죄자들을 특정한 곳에 보내 써먹는다는 이 기록들은 황제 지배 체제가 견고해진 근거로 자주 인용됩니다.  왜냐하면 범죄자들을 색출, 체포해서 한 곳으로 압송하는 일에는 만만치 않은 행정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진시황의 명령이 실제로 시행되는지를 시험하는 도구로 여겨졌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가설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사료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세황제 호해가 즉위 직후 관료들과 진시황의 여러 자식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이에 조고가 황제에게 불시에 순찰을 돌아 법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이들을 처벌한다면 권력이 안정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즉, 이세황제 호해에게 있어서 범죄자 색출과 처벌은 권력 강화의 수단이었으며, 아마 이는 진시황의 방법을 모방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황 36년 동군 지역에는 진나라의 미래를 암시하는 불길한 유언비어가 퍼졌습니다. 그 해 가을 관동지방, 즉 옛 동방 육국에서 돌아온 관리가 어떤 이가 올해 조룡祖龍이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사라졌다고 보고했으며 그 증거로 그가 지녔던 옥벽玉壁을 제출했습니다. 그 옥벽은 진시황이 8년 전 강을 건너다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에 진시황은 이것을 가지고 점을 치니 유람을 떠나는 것이 길하다는 괘가 나왔습니다. 어쩌면 이 점괘는 진시황이 다시 직접 순행을 가야겠다는 결심의 반영인지도 모릅니다. 진시황 37년, 진나라 도읍이 있는 섬서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높은 오와 초, 지금의 호북湖北, 절강浙江성으로 순행을 떠났습니다. 특히 초라는 지명은 훗날 진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너도나도 사용한 이름으로 당시 초나라 지방에 반진 정서가 얼마나 팽배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시황이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이곳으로먼저 순행을 온 것은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시황은 이 순행길에서 병사합니다. 뒤를 이어 호해가 이세황제로 등극하고, 전국의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선 북쪽의 연 지방으로 순행을 갔다가 돌아오지만, 바로 진승등이 옛 초나라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진나라 멸망 뒤 초한전쟁에서 유방이 항우를 쓰러뜨리고 한나라를 세운 지 사십 여 년이 지났지만, 가의의 《과진론》은 아직도 당시 황제와 중앙정부가 군현제를 통해 지방을 관리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같은 시대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산동 지방에서 출토된 은작산銀雀山 한간漢簡에 있는 《왕법王法》、《천법天法》이라는 제목을 가진 법조문들은 가의의 주장을 지지하는 중요한 열쇠를 제공합니다. 상앙변법 이후 진나라 계열의 법조문들에는 《~~률》이라는 식의 이름이 붙기 시작하지만, 제나라 계통의 법조문은  《~~법》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면서 통치의 본으로 삼은 것이 진나라의 법률과 제도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지방에서 전한 중앙 정부의 통치를 인정했다면 진나라의 법조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은작산 한간의 《왕법》과 《천법》 등의 법조문들은 한문제시기에도 산동지방이 진나라의 법이 아니라 전국시대 제나라의 법을 여전히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제도적으로도 아직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있음을 시사해줍니다.   


    민국초, 고힐강顧頡剛이 일으킨 고사변古史辨 운동은 전통시대 진리라고 여겨졌던 《오경五經》 가운데 많은 부분에 후대의 가찬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진한시대 당시의 학자들의 기록도 일단 의심해보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근래 발견된 출토문헌들에 기존의 전승된 《오경五經》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사례가 제법 되기 때문에 신고信古적 학풍이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출토 문헌이 진한 시대 학자들이 남긴 기록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출토 문헌을 가지고 기존의 전승된 문헌들을 검토한다는 것은, 전자가 무조건적으로 진실을 담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재 출토 문헌과 이를 통해 사실史實이 입증된 전승 문헌은 황제 전제 통치 이론의 근간이 되는 사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진한시대 학자들이 남긴 기록은 현재의 학자들이 출토문헌을 연구하여 세운 학설들, 특히 “진한제국”이나 “황제지배체제”라는 개념을 반박하는 증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한시대 학자들도 현재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출토문헌들을 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과연 진한시대 학자들이 지금의 학자들보다 어리석었을까요? 물론 진한시대 학자들의 기록을 무조건 신뢰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진한시대부터 전승된 기록이 출토문헌의 기록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는 경우, 출토문헌의 기록은 무조건 옳고 전승된 기록은 무조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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