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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ug 04. 2019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는 까닭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했다는 신문에 대해 일각에서는 한국이 좀 더 몸을 사려야 했었다는 주장이 제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국력이 한국을 상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조가 형주를 침공하기 시작할 때 유표가 죽고 그의 자리를 물려받은 유종이 항거할 결심을 비치자 그에게 부손이라는 신하가 말했다.


“신하로서 황제를 옹위하는 조조의 군대에게 저항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그리고 유비도 조조에게 패했는데, 군주께서는 유비와 스스로를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설사 형주를 지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는 보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 


이에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만약에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았다면, 조조도 섣불리 남하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주의 군세는 조조에 비해 전혀 꿀리지 않았기 때문이며, 관우, 장비 그리고 조운이라는 당시 가장 걸출한 무장들의 지휘는 형주병의 전투 능력을 제고시켜 정면에서 회전을 벌였더라도 충분히 승산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형주병이 조조에게 넘어간 이상, 극심한 병력의 차이때문에, 유비와 손권의 목숨은 풍전등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의심많은 조조도 황개의 골육지책에 속아버렸으니까. 조와 싸울지 아니면 항복할지 고민하던 손권에게 노숙은 이렇게 설득하였다.


“지금 노숙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괜찮습니다만, 장군은 안 됩니다. 조조는 노숙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그 지위와 명성을 유지시켜주겠지만, 장군깨서 항복한다면 어디로 가시려는지요?”


노숙의 말을 곱씹어 보면 평범한 서민들은 전쟁보다는 항복을 반길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전쟁이 벌어지면 거진 죽은 목숨이지만, 항복하면 예전처럼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근대 시대, 왕조가 계속 교체되더라도, 어설프게 항거해서 학살을 당하지 않는 한, 서민의 삶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므로 개인이 국가의 부름에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주장이 파시즘에 가깝다고 반감을 표시하기도 하며,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국수주의의 표상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들은 한국의 주권은 국민 모두에게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오나라의 주권은 손권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한국의 주권은 모든 한국인이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과 한국인은 오나라와 손권처럼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살 것을 포기할 자유도 있다. 물론 본인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하등의 가치가 없을 경우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들처럼 한국인임을 포기할 생각이다. 그러나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주권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상, 일본이 걸어온 싸움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번 한국과 일본의 경제전쟁은 조국 전 민정수석이 페이스북에 설명한 대로 한국의 사법 주권이 일제강점기의 불법성을 지적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경제 공격에 타협하자는 일각의 주장은 한국의 주권자라면 양보할 수 없는 일제 강점기의 불법성, 혹은 부당성을 언급할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작금 일본은 일제강점기의 슬픈 역사를 공식적으로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고 할 뿐 아니라, 행정부로 하여금 사법부에 간섭하라는 타협 자체가 불가능한 요구를 하고 있다. 


아마 약간의 진보연하는 자들은 이런 주장을 가리켜 극우 파시즘의 재림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듯하다. 국가에 몸과 마음을 바치면 강대무비한 적을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대본영의 선전과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지만 이는 저들이 신민과 시민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떤 가치를 지키겠다고 결심한 이상, 설사 질 것을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여야 할 때가 있다. 하긴 저 진보연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국가란 개인을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유 의지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는 시민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장비가 조조군을 장판파에서 홀로 막아내기로 결심한 것도 과연 세뇌당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장비 스스로도 혼자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을까? 저 진보연하는 이들은 개인이란 무릇 국가에게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 의지도 부정하는 자승자박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일부 보수연하는 이들은 일제 강점기가 남긴 물질적 혜택, 근대화의 유산 덕분에 한국이 발전할 수 있었으므로, 심지어 과거는 잊고 우호적인 미래를 건설하자고 한다. 즉, 과는 공으로 덮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이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에게 남긴 상처는 작금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치 지난 6월부터 홍콩에서 계속 진행되는 반중 시위가 홍콩인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것 처럼 말이다. 물론 친일파로 창씨 개명을 하여 일본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라고 나무랄 생각은 없다. 국가와 민족이 개인보다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국인이 되는 길을 선택한 이상 일제 강점기의 아픔에 대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역사는 어떤 민족 혹은 어느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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