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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Aug 28. 2019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함은 없다

조국 딸 대입 논란에 부쳐

박사 논문의 1장을 어느 잡지에 투고한 지 한 달 반이 지나간다. 잡지의 투고 요강에는 한 달이면 등재 여부가 결정될 것이라고 했지만, 아무 소식이 없다. 제 2 장은 다른 잡지에 투고했는데, 여기는 두 달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이런 와중에 조국의 딸이 조민씨가 고등학교 때 단국대 의대에서 인턴십을 2주 동안 수행했는데, 의학논문에 제 1저자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처음에는 허탈했다. 누구는 1년 이상 시간을 들여 원고를 작성하고, 수정해야 하며, 투고 후에도 기약없이 기다려야 하는데, 누구는 제 1저자가 되는데 단 2주의 시간이 걸리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듯 하다.

그런데 근 며칠 간 인터넷에서 조민씨의 제 1저자 등재에 사실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관련 전공 전문가들의 글이 올라왔다. 예컨대 페북에 올라왔었던 이진하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제1저자의 결정은 책임저자나 그 논문 생산에 일조한 연구원들의 동의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딴지일보에서도 실제로 논문을 글로 작성한 사람이 대개 제1저자가 된다는 글이 올라왔다. 즉, 저쪽 업계의 제1저자 결정은 연구의 총 책임자의 재량에 달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조민씨를 지도했던 단국대 장영표 교수도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결국 이는 자기 책임이라고 했다. 따라서 조민씨를 제 1저자로 삼은 것이 문제가 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해당 학문의 연구 윤리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조국씨가 법무장관이 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김호창씨가 페북에서 지적했듯이, 조국씨가 장영표 교수에게 조금이라도 청탁을 했다면 사퇴 이유가 충분하며, 이것이야 말로 한방에 그를 날릴 수 있는 핵심인데, 지금까지 이를 언급한 언론은 찾아볼 수 없다. 노무현 논두렁 시계 조작 때처럼 언론이 조국을 물어 뜯는데, 청탁 여부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조민씨의 논문이 고대 입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를 보여준 기사도 하나 없었다. 물론 향후 검찰이 이와 관련해서 새로운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까지는 조국씨가 딸 조민씨의 대입 관련해서 불법을 저질렀다는 주장은 선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선동에 넘어가, 나름 한국에서 똑똑한 축에 속한다고 인정받는 서울대와 고대생들이 조국 사퇴 촛불시위를 열었다. 선동에 넘어가 횡설수설한 부분을 비계 자르듯 제거하면, 그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난 까닭은 정의를 외친 이들이 오히려 공정하지 못한 작태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살코기처럼 드러난다. 기득권과 비기득권의 차이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는 프듀X에서 불거진 순위 조작 논란이나, 내 능력보다는 가문이 더 중시되는, 불공정한 경쟁으로 전화되는 현재, 정의를 외친 이들조차 실은 기득권처럼 행동했다는 것이 그들이 분노한 주된 이유일 것이다. 기실 기득권의 존재 자체로도 경쟁은 불공정해지기 마련이다. 예컨대 본인도 집안이 거지꼴을 면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지난 근 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매일 생계를 걱정하며 중국사 공부를 해야한다. 따라서 함 따져보니 박사 학위를 딴 이후에도 잘 해야 1년에 한 편 정도만 논문을 쓸 수 있으니, 대학에서 자리잡을 정도의 학술적 성과 자체를 생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정함이란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세상에 아름다운 추녀가 어디 있으랴. 정말로 공정하게 대입 입시를 진행시키고 싶다면, 먼 옛날 그리스 스파르타처럼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합숙 교육을 시켜야 한다.  

따라서 조국은 이 빌어먹을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의 희생양에 불과하다. 물론 입방정이 지나친 감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조국을 두드려 팬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사회를 걱정하는 이들이 더 조심해서 언행일치를 하려고 노력할까? 천만에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를 감행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를 논하면 할 수록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가족들마저 위선자들이라는 낙인에 찍혀 고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득권은 그 존재 자체로 불공정함을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정의를 말하는 순간 위선자가 되기 십상이다.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이 가진 모든 종류의 자본들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계급이 공고해진 사회에서 알거지가 된, 왕년의 기득권자의 외침은 공허 속의 메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극소수이지만, 전한 시대 말 왕망처럼 기득권을 유지함과 동시에 진심으로 사회 개혁에 매진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왕망의 개혁은 너무 급격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아마 왕망도 조금이라도 개혁이 느슨하지면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을 두려워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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