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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목란 바라기 Oct 12. 2019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라는 불쏘시개를 읽다

“가설은 대담하게, 그러나 증명은 조심스럽게”


청말민초 중국 역사학자 호적胡適의 명언이다. 그리고 역사를 공부하면 할수록 이 말의 무게를 실감하게 된다. 왜냐하면 많은 학자들이 가설만 대담하게 제시하지, 증명에는 소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께도 이런 나쁜 습관을 가진 학자들이 대중들에게 더 주목받는 것 같다. 아마도 원대한 이론이라는 외피를 쓰고 나타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컨대 일전에 어떤 선생님께서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 개념을 극찬하셨던 적이 있다. 본인이 소리명창보다는 귀명창이지라고 하면서 스스로 안목이 높다고 자부하셨기 때문에, 믿고 가리타니 고진의《제국의 구조》를 구매해서 탐독했다. 1장은 가리타니 고진이 해석하는 맑스주의에 관한 것이고, 2장은 인류학 방면의 연구 성과를 자신의 관점에 의거하여 재구축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4장 "동아시아의 제국"을 읽으면서 이마를 짚을 수 밖에 없었다. 본인이 이해하는 제국이라는 개념을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중국사를 왜곡했기 때문이다. 


“제국의 원리는 아시아에서 나온 것입니다.”


가리타니 고진은 제 4장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아시아는 중국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중국사의 무엇이 과연 가리타니 고진이 말하는 제국의 원리를 낳았을까? 일단 그가 언급하는 제국의 원리가 무엇인지 그 정의를 살펴보자. 


가리타니 고진은 “제국의 원리”는 “제국주의”와는 달리 정복된 상대를 전면적으로 동화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즉, 정복된 상대의 부족이나 국가의 내부에 간섭하지 않으며, 피정복자들도 조공이나 공납을 통해 적극적으로 복종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 기저에는 호수성, 즉, 상호 증여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누군가 지배자가 되고 싶다면 피지배자가 될 이들에게 과감하게 부를 증여하기 때문에 절대권력이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수렵채집민의 유동성을 고차원적으로 승화시키면 실현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제국의 원리에 의해 운영된 제국은 만민법, 세계 종교, 세계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의 원리는 과연 중국사에서 정말 나온 것일까? 


“아시아적 전제국가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전제군주를 폭군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백성을 극진히 보호하는 것이 군주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간주되었습니다.”

“제국의 그저 무력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리타니 고진이 제국의 시초라고 부른 진나라는 폭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하지만 가리타니 고진은 이 사실을 반박하기 위해서 진나라의 도량형 통일, 도로 수리, 화폐의 통일이 페르시아 제국의 것과 공통되며, 이는 지역적인 폐쇄성을 넘어선 교역의 확대를 실현시켰다고 하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논리에는 문제가 있다. 진나라가 지역적인 폐쇄성 극복한 것이 과연 폭력을 통해 통일 중국을 지배하지 않은 근거로 제시될 수 있을까? 즉, 지역적 폐쇄성 극복과 폭력에 의한 통치는 아무 관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취한 군현제에서는 중앙에서 각지로 파견한 관리들은 황제보다는 법의 명령을 받들었다고 하며, 이를 만민법의 탄생과 결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황제와 관리들은 철저한 주종관계로 묶였다. 기실 황제의 관리들은 가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주종관계는 제후들과 그의 부하들, 심지어 부유한 보통 백성들과 그들이 부리는 노예 사이에서도 보인다. 설사 진나라의 법이 통일 중국 전체에 적용되는 것을 목표로 제정되었고, 실제로 그런 모습이 나타났다고 해도, 저 주종관계를 빼놓고 진나라 현실의 권력의 작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가리타니 고진은 중국사를 진나라까지만 공부한 것 같다. 왜냐하면 한나라 이후부터는 점입가경이기 때문이다. 한 제국의 성립을 설명하면서 유교의 국교화를 기독교의 국교화와 비슷하다고 뻥을 친다……….신발, 한나라 중기 황제인 한선제漢宣帝가 본인 입으로 한나라의 학문은 "霸王道杂之”, 법가, 유가, 그리고 도가가 짬뽕되었다고 선언했다. 물론 뒤에서 유교는 종교라고 하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관료제와 결부된 학문이라고 발을 뺀다. 도대체 가리타니 고진은 유교에 대한 이 모순된 설명 가운데 어떤 것이 타당하다고 여길까? 그리고 한나라의 유교가 관료제를 확립했다고 하면서, 당시의 관료 후보층은 관리양성소에서 유가 경전을 교육받은 고관의 자제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정한 관리의 자격일까? 유가 경전의 지식일까? 아니면 고관의 자제라는 신분일까? 안타깝게도 후자에 속한다. 위진남북조 시대를 귀족제 시대라고 하는데, 이것의 기원은 한나라에서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가리타니 고진은 한제국 초기 노자의 무위 사상이 국가적 교의로 채용되었다고도 구라를 친다…….한문제漢文帝의 젊은 신하 가의賈誼는 본인 입으로 무위의 통치란 무능한 이들이 언발에 오줌을 누는 것에 불과하다고 극렬하게 비판했다. 


물론 가리타니 고진의 진한시대에 관한 엉터리 설명은 시중에 있는 중국사 개설서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가리타니 고진이 전문 역사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개설서를 참고해서 제국의 원리라는 이론을 제시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당나라때 유교의 발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확언하는 부분을 발견하자 어이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왜냐하면 위진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이 연구한 유학이 바로 당나라때 《오경정의》로 집대성했다는 건 개설서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당나라가 유목민 국가라는 사실을 유지했다고 한다. 설령 당나라를 건국한 이들이 유목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이 과연 유목민 국가의 원리를 유지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당나라는 그 때까지 발전된 중국의 법학을 무지막지한 분량의 《당육전》이라는 법전을 편찬하면서 집대성하였다. 그런데 유목민 국가들 가운데 《당육전》의 발끝만치라도 따라가는 법전을 편찬하고 이를 통치 원리로 삼은 나라가 있는지 참 의심스럽다. 즉, 가리타니 고진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 한국인 3세의 출신이 한국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한국인들처럼 나이에 의거한 위계질서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여기고 있다고 말이다. 


 “제국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상이 필요합니다.”


도대체 이게 뭔소리인가? 가리타니 고진은 평화와 통상을 가능하게 하는 사명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고, 이는 유목민들이 중국의 천명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나왔다고 하였으며, 그 예로 칭키즈칸을 들었다. 


"칭기즈칸은 세계정복을 통해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전승입니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을 움직인 것은 확실합니다.”


무엇이 확실한가? 근거는 있는가? 칭키즈칸이 세계 평화를 말했다는 것도 전설에 불과하다. 즉, 증거없는 낭만화에 불과하다. 그리고 천명은 어디까지나 누가 지배자가 되느냐에 관한 사상이다. 그러나 평화와 통상까지 강조했다는 것은 너무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호수제는 누군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정령의 명령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제국의 원리를 지탱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인 호수제, 즉 상호 증여의 원리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어떻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가리타니 고진도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세부 사건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거대 이론은 신앙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제국의 구조》가 제국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예시로 들고 있는 유럽의 근세나 일본의 역사 등에서는 가리타니 고진의 저 이론이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국사에 관련해서는 이 한 마디로 갈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틀렸어.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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