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Feb 23. 2022

여러분 꿈의 시제는 어디쯤인가요?

꿈을 꾼 후에: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

오랜만에 다음 편이 기다려지는 드라마를 만났다. 이제 겨우 4화까지 밖에 공개가 되지 않았기에 조금은 섣부른 기대일지도 모르지만. 아마, 20년 전에 내가 열광했던 <네 멋대로 해라>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 하나> 포스터(출처: tvN)

의도적으로 90년대 <느낌>과 같은 청춘드라마를 본 딴 듯한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 그리고 <걸어서 저 하늘까지>와 같은 비장함이 느껴지는 엔딩곡, 동시에 <응답하라> 시리즈가 추구하는 복고 감성이 적절히 버무려진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시점의 꿈을 산다.  


백이진(남주혁)의 지난 삶은 꿈만 같았다. 재벌 2세, 화목한 가정, 잘생긴 외모, 공부까지 잘했던 그는, IMF사태로 인해 잘생긴 외모를 제외한 모든 걸 빼앗겼다. 그가 살던 저택은 셋방으로 바뀌었고, 화목했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연대 공대를 다니며 나사에서 우주비행을 꿈꿨던 청년은, 대학을 휴학한 후 만화방 아르바이트, 신문배달을 하며 취업자리를 알아보게 되었다. 마치 한 편의 달콤한 꿈에서 깬 것과 같은 그의 앞에 인생에 고민하나 없어 보이는 나희도가 찾아온다.  

IMF로 인해 산산조각 난 백이진의 꿈은, 과거형이다(출처: tvN)

고유림(보나 분)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녀는 이미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꿈을 이루었다. 그녀는 태릉선수촌 입소를 앞둔 어느 날, 아버지에게 스스로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내 인생에 금메달이 저거 하나면 어쩌지? 내 전성기가 끝이면 어쩌지?

그렇게 그녀에게 꿈이란 이뤄나갈 목표가 아닌, 지켜나가야 할 존재이다.

어린 나이에 정상에 오른 유림에게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출처: tvN)

주인공인 나희도(김태리 분)의 꿈은 언제나 미래형이다. 펜싱 신동으로 주목받았으나 긴 슬럼프에 빠져 그저 그런 선수가 된 그녀의 꿈은 동갑내기 고유림과 같은 세계에 사는 것이었다. 유림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분식집에서 몰래 그녀를 관찰하고, 비 오는 날에 그녀를 위해 자신의 우산을 던져주며 기뻐할 정도로 희도에게 유림은 아이돌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가 우여곡절 끝에 함께 살게 된 고유림의 세계는 생각만큼 우아하지 않았다.


희도는 좌절하지 않는다. 그녀의 다음 꿈은 '국가 대표 나희도'로 진화해 나간다. 스스로 너무 많은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해도 실망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백이진은 그런 그녀가 강한 정신력을 가졌다며 칭찬한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시련에 꺾이지만 부러지지 않고 회복하는 인간의 능력을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 한다.

나희도의 꿈은 늘 미래형이다(출처: tvN)

나희도가 행복한 이유가 단순히 그녀의 회복탄력성 때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꿈이 늘 미래형인 것 또한 한몫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는 모든 이들이 행복한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꿈 회의론자’가 되었다. 꿈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꿈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이루기 힘든 큰 업적들을 이루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의 무게가 꿈을 짊어진 이들의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집어삼키는 경우를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꿈이라는 열매 때문에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을 희생하는 것을 나는 경계하는 것이다. 고유림이 금메달을 향해서 노력하던 나날들이, 아마 그녀의 현재보다 행복할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한 어린 물고기가, 아버지에게 '전 언젠가는 넓은 바다에 꼭 갈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아버지는 아이에게, '얘야 우리가 지금 있는 물이 바다야'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믿지 않았죠. 줄곧 바닷속에 있었음에도. 그는 줄곧 바다로 가고 싶어 했어요. (픽사 영화 <소울> 중의 대사)


나희도가 다른 주인공들과 다른 점이 바로 여기 있다. 그녀는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도 그 찰나의 행복들을 중요시한다. 그런 그녀에게 단 꿈에서 막 깨어난 백이진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넌, 날 기대하게 만들어" 이진은 희도에게 말한다(출처: tvN)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꿈에서 깬 후의 나희도는 여전히 행복할까?

꿈은 우리 삶의 큰 방향을 정해주는 나침반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경험하는 하루하루가 모여 꿈을 이룬다. 꿈에 압도되지 않고 그 찰나의 순간들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면, 꿈의 성취 유무와 상관없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아는 나희도는 아마 꿈을 이루든, 이루지 못하든, 행복할 것이다.  

아마 희도는 꿈을 성취하든, 실패하든 행복하지 않을까(출처: tvN)

보다 많은 구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플랫폼들을 이용하지 않고 브런치에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에 비슷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모인 이곳.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금, 여기’에 감사하며 브런치에 글을 쓴다.













작가의 이전글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세상을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