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할 말이 있어.
뭔데?
사람이 다양한 건 알지만...A를 보면 조금 불편해.
이제 막 새 학교에서 유치원 첫 학기를 시작한 다섯 살 딸아이가 어느 밤 잠들기 전 문득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영문을 잘 모르겠어서, 조금 더 질문을 했는데도 아이는 좀처럼 자신이 왜 불편한지를 말하지 못했다.
마침 다음날 학교에 딸아이를 바래다주려고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는데, 딸아이가 말한 친구로 추정되는 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서있었다. 다가가 아이를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그 친구는 경도의 지적장애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친구의 아버지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딸아이가 새로 학교에 전학 왔으며, A와 같은 반이라고. 딸아이와 A와도 인사를 시키고, 그렇게 둘은 나란히 같이 교실까지 들어갔다.
선생님이 일과 중에 보내준 사진을 보니, 둘이 같이 노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도 보였다. 그날 밤, 딸아이에게 오늘 아침에 A와 만나서 아빠가 너무 반가웠다고, 좋은 친구인 것 같다고 이야기하며 넌지시 물었다.
"아직도 A가 불편하니?"
"아니, 이제 편해졌어."
인간은 대부분 자기와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는' 사람보다는 비슷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딸아이의 경우에는 고작 IQ 5-10 정도의 차이로 인한 다름이었지만, 사실 다름의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 가장 단순하게는 피부색에서부터, 머리 모양, 언어의 억양 등등. 동양인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어떤 친구는 동양인인 딸아이를 처음 봤을 때, 부모에게 불편했다고 말했을지 모를 일이다.
다섯 살 아이들의 마음에서도 드러나듯, 이처럼 '나와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 대한 경계심 내지는 불편함은 우리 뇌에 꽤나 본능적으로,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진화론적으로 나와 달라보이는 사람에 대해 경계심을 갖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을 거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물론,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진화론적 설명으로 편견을 정당화해서는 안될 일이다. 단지, 어쩌면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타인에 대한 다른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편견을 깨뜨리는 방법은, '사람 도서관'처럼 역시나 나와 다른 사람을, 가능하면 어릴 때부터 자주 만나는 일이다.
오늘 아침 딸이 그린 그림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 그리고 휠체어를 탄 사람을 밀어주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옆에는 큰 차를 한 대 그려놓고는, 휠체어 탄 사람이 차에 탈 수 있도록 이동하는 장면이라고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미국에는 거의 모든 버스들에 휠체어가 탈 수 있으며, 휠체어를 탄 사람을 위한 택시들도 자주 눈에 띈다).
딸이 즐겨보는 만화들에는 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페파 피그>에서 맨디 마우스라는 캐릭터는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맨디 마우스가 처음 학교에 온 날, 친구들은 함께 체육 활동을 한다. 동산 위에 있는 페파네 학교의 지리 탓에 맨디는 가장 빠르게 동산을 내려간다. 당연히 친구들은 따라잡질 못한다. 하지만 학교로 돌아오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데는 친구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친구들은 자연스레 맨디를 뒤쫓기도 하고, 또 돕기도 한다.
또 다른 만화 <라마 라마>에 나오는 오드리는 오른쪽 팔꿈치 아래가 없는 장애를 가진 캐릭터이다. 그리고 왼쪽 무릎 밑으로도 다리가 없어서 발에 의족을 하고 있다. 오드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곧잘 운동을 하고, 드럼을 연주하기도 한다. 내 어린시절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캐릭터들이라 더욱 반갑다.
우리 사회에 낙인이라든가, 혐오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인류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변호사 우영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의의는 '대중의 반응 그 자체'라 생각한다. <말아톤>이 개봉했던 20년 전이나 <굿닥터>가 방영되었던 10년전에는 이런 비판적 논의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딸아이가 커서 이루어갈 사회는 맨디나 오드리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사회가 되리라 희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