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너였다면, 나라도 그랬을거야.

타인의 신발을 신는 일의 전제 조건에 대하여

내가 너였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I would have done the same if I were you)


나의 정신과 레지던트 생활은 미네소타의 한 시골 마을에 있는 병원에서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 따뜻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첫 수련 생활이었다. 교수님들과 레지던트 선배들은 미국 병원 경험이라고는 학생 때 한 달 조금 넘게 참관을 했던 것이 전부였던, 의대생보다 훨씬 일 못하는 외국 의대 출신 레지던트였던 나를 끊임없이 다독여주었고, 배움의 길로 인도했다. 분에 넘치는 수련 환경이었지만, 6개월이 지났을 무렵, 나는 아내의 직장때문에 뉴욕으로 이직을 결심해야만 했다.

Rochester-MN-skyline-iStock-1368538030.jpg.webp 미국에서의 레지던트 생활은 미네소타의 한 시골 마을에서 시작됐다(출처: Livability.com)

한국 생활에 오래 익숙해졌던 나에게, 이직 결심 그 자체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이직에 대해 교수님들, 동료들에게 내 결정을 전하는 일이었다.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내게, 이유를 불문하고 수련받는 병원을 바꾼다는 것은 '배신'처럼 느껴졌다. 병원 입장에서는 내가 떠난 빈자리를 누군가로 메꾸어야만 한다. 그리고 만약 충원을 하지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내 몫의 당직까지 서야 한다. 그렇게 고민고민 끝에, 어렵게 말을 꺼냈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이었다.

내가 너였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이직 후에도 직장 상사, 동료, 친구들에게 이 말을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 말이, 커리어의 고비고비마다, 그리고 굵직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단순히 공감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공감에는 정서적 공감과 인지적 공감이 있는데, 인지적 공감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말 아닌가. 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 흘려주고 가슴 아파하는 것이 정서적 공감이라면, 인지적 공감이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걸어보는 것'이다. 인지적으로 '나'를 '타인'의 자리에 놓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생활의 걸음마기나 다름없던 레지던트 시절에는 이 말이 마냥 감동적이기만 했다. 하지만 미국 생활에 대한 환상(aka 미국병)이 어느 정도 깨지고, 차츰 미국 생활의 짬밥이 늘어가면서는, 조금씩 이 말이 가능한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찾은 답은, 바로 사회가 가동하는 용량의 차이였다.


미네소타의 시골에 위치한 병원에서는,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아마 최대 가동할 수 있는 만큼의 60-70퍼센트 정도로 병원이 돌아갔던 것 같다. 따라서, 내가 없어도 동료들에게 돌아갈 내 몫의 일이 크지 않았다. 처음 아빠가 되었을 때, 출산 휴가를 2주 써도 전혀 눈치 보일 일이 없는 구조였다. 심지어 내가 떠난 후에, 수련부장 교수님은 지원자들이 있었음에도, 내 자리에 추가적으로 레지던트를 뽑지 않았다(물론 그만큼 동료들이 어느 정도는 희생해야 했고,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1e858368-9a3d-46d2-ae67-ff743fd8ed74-AP_St_Vincents_Hospital.JPG?width=660&height=447&fit=crop&format=pjpg&auto=webp 뉴욕에서의 병원 생활은 훨씬 열악했다 (출처: USA Today)

뉴욕으로 온 후에는 모든 게 달랐다. 레지던트 인원도 두 배정도 많았지만, 담당하는 병원도 세 병원이나 됐다. 당직 일정도 미네소타의 두 배는 되었다. 그리고 당직을 설 때의 업무 강도도 훨씬 고됐다. 따라서, 레지던트들끼리 나눠야 할 일도 그만큼 많았다. 아무리 좋게 봐도 한도 용량의 8-90퍼센트로 달리는 구조였다. 부모들은 출산휴가를 쓸 때 눈치를 봐야만 했고, 레지던트가 사정이 생겨서 일을 그만둘 경우,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체 인력을 구했다. 나도 그렇게 빈자리가 났기 때문에 뉴욕대 레지던트가 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한국은?


한국은 한도 용량의 120퍼센트 이상으로 달리는 사회라는 생각을 한다. 레지던트 한 명이 나가면, 다른 동기는 죽어난다. 동기가 도망갔다고 하면, 내 앞날이 걱정될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내가 너였다면, 나라도 도망갔을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군자에 가까울 것이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한국사회의 굉장히 많은 문제들이, '너만 힘드냐? 나도 힘들어 죽겠다'에서 시작한다. 이 말을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너도 많이 힘들었구나'로만 바꿀 수 있어도 굉장히 많은 사회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면, 문제의 시작은 '모든 사람이 너무나 힘든 사회'에 있는 게 아닐까? 내 신발도 찾아 신기 힘든 사회에서 남의 신발을 신어볼 여력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분들이 있다. 그리고 그분들은 두 배, 세배의 찬사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images?q=tbn:ANd9GcSe1Tqz7-2ULNn-CH1XKwzPbDGj8LifklUZlA&usqp=CAU “꽃이 피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 꽃이 자라는 환경을 고쳐야 한다”

내가 책에서 말한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사회'는 이상향이 아니라 생각한다. 단지, 내가 발붙이고 있는 사회가 내 신발은 확실히 챙길 수 있는 정도의 확신은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을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조세호 씨 눈맞춤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