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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Dec 18. 2020

모두 제 성격 탓이라구요?

성격(인격) 장애에 대한 낙인에 대하여

3년 전, 샤이니의 리더였던 종현 씨의 유서를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 내가 알 길은 없었지만, 유서 전반에 퍼져있는 절망감과 회의감, 그리고 차가운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정신과 의사와 했던 면담에 대한 내용을 유서에서 읽는 동안, 나는 마치 진료실 안에서 그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근한 목소리로 내 성격을 탓할 때, 의사 하기 참 쉽다 했다.



(다음 내용부터는 종현 씨와 전혀 상관없는 글임을 밝힙니다).


최근, 가수인 선미 씨가 한 방송에서 경계선 인격(성격) 장애 진단을 고백했다는 기사를 봤다.

선미 씨가 경계선 성격장애를 고백하는 장면 (출처: 미주 중앙일보)

성격 장애 (혹은 인격 장애; 순전히 개인적 생각이지만, 성격 장애가 인격장애에 비해 그나마 덜 환자에게 낙인을 찍는 것처럼 들리는 것 같아, 성격 장애를 선호한다) 환자들은 중독 환자들과 더불어 정신과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환자 들 중 하나이다. 미국에서 정신건강 관련 종사자들이 대화할 때 흔히 "아 걔 경계선이잖아 (Ah he/she's borderline)"라는 표현을 쓰기도 할 정도이다.


경계선 성격장애로 대표되는 성격장애 군 중 B군 성격 장애 (경계선/자기애성/연극성/반사회성)는 격렬한 감정 변화와 충동적인 행동들을 보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직접 시청한 적은 없지만,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여주인공은 반사회성 성격장애 환자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B군 성격 장애 중에서 경계선 성격 장애는, 버림받는 것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 격렬한 감정 변화, 불안정한 대인 관계, 자아에 대한 혼돈감, 흑백 논리적 사고, 그리고 충동적인 행동 등(자해, 약물 중독 등)을 특징으로 한다. 많은 수의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이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주인공은 반사회성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출처: tvN)

정신과 의사들이 쓰는 글들에서도 이들에 대한 편견이 묻어나는 글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가령, 경계선 성격 장애 환자를 고치는 방법은 사랑으로 모든 걸 안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뿐이라든가, 사실상 치료방법이 없는 것처럼 쓴다든가 하는 경우를 봤다. (이는 사실이 아니고, 경계선 성격장애를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밝혀진 치료 기법에는 Good psychiatric management, 전이 초점 치료 (Transference focused psychotherapy), 변증법적 행동 치료 (Dialectical Behavioral Therapy; DBT), 도식 초점 치료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나 또한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에 대한 편견이 없지 않았다. 전에도 몇 번 다른 글에서 언급한 적 있었던, 나에게 인종차별적 언사를 퍼부었던 나의 첫 병동 환자의 진단 명 또한 경계선 성격 장애였다. 그녀는 입원하기 직전에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던 중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남편의 트럭을 몰고 집에 돌진했었던 전력이 있었다. 그 환자뿐만 아니라, 여러 경계선 성격 장애 환자들의 치료 과정에서 힘든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경계선 성격 장애 환자들에 대한 편견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레지던트 동기였던 A는 묘한 아이였다. 조그만 체구에도, 어찌나 당찼던지. 우리 동기 중에서 정신의학에 대해 가장 폭넓고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동기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었다. 벨뷰에서 처음 입원 병동을 돌 때, 많이 힘들어하던 나를 잘 챙겨주었던 그녀.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2년 차가 끝나가던 무렵, 아무 생각 없이 페이스북에 접속했을 때, 뭔가가 잘못되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페북에 믿을 수 없다는, 애도의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고, 직감이 왔었다. 그녀가 자살로 사망했다는 것을.


모두들 이제 갓 정신과 의사가 되었던 때 동기들끼리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병동에서 만난 자살 생각이 심했던 환자 이야기를 하며, 그 환자의 환경을 생각했을 때, 자살을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다며, 자살에 동조하는 듯한 이야기를 했었다.

동기들끼리 환자들의 자살 생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녀도 함께 있었다 (출처: pxfuel.com)

그러자 친구는 진지한 표정으로, (거의 화를 내듯이) '정신과 의사로서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었다. 자살 생각이 심할 때 환자는 정상적인 사고를 하기 힘든 상황이니까, 우리들까지 환자들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라고.


돌이켜보면, 그녀 본인의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녀가 떠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오래전에 이미 경계선 성격 장애를 진단받았었고, 알코올 중독과 만성적인 자살 생각으로 장기간 치료 중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떠난 후로, 나는 경계선 성격장애, 중독 환자들에게 훨씬 더 심정적으로 가까워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보면 나에게 욕을 퍼붇던 첫 환자가 아닌, 내 동기가 생각났고, 그 덕분에 나는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계선 성격 장애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의사들이 진단을 내린 후에도 환자에게 진단명을 알려주기 꺼리는 질병이기도 하다 (실제로 외래 치료를 1-2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본인의 진단명을 몰랐던 환자들도 자주 봤다). 의사들도 때로는 모르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는 이유는 환자를 낙인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병에 맞는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에게 단순 우울증이라고 진단을 내리고 약을 아무리 처방해봐야, 우울증은 나아질지언정, 기저의 성격장애는 나아지지 않는다.  


정신과 의사로서, 선미 씨가 스스로의 진단명을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점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 좋은 치료자를 만나서, 그녀가 스스로 낙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잘 설명하고 치료과정을 동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로, 더 많은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들이 떳떳하게 치료받을 수 있길 기대한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정말 강한 사람이다.


화상으로 진행된 우리 동기들 졸업식에서, 우리는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던 우리의 친구를 같이 추억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구절을 그녀를 위해 헌사했다.


마지막으로,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 앞에서 길을 잃었을 때,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A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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