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 활성화 (behavioral activation)에 대해
글을 쓰는 걸 옛날부터 좋아했었다. 싸이월드 세대로서, 다이어리에 글을 쓰는 걸 무척 좋아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비밀 번호도 잊어버렸지만, 다시 읽으라면 오글 거려서 못 읽을 것 같다).
흔히들, 글을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단적으로, 나는 우울할 때에는 글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레지던트 생활이 한참 힘들던 시기에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부족했지만, 쓰려고 마음먹어도 글이 써지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정신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작년부터 조금씩,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요즘 같은 유튜브 시대에 진부하게 누가 글을 읽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다름 아닌,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다. 우울증 치료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는, 정신 분석, 인지 행동 치료를 포함한 심리 치료와 항우울제 등의 약물 치료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심리 치료에는 수많은 기법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행동 활성화 (behavioral activation)라는 치료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행동 활성화란, 단순히 말하면,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활동들을 계획해서 실행하고, 내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들은 최소화하는 행동 치료법이다.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우선, 종이 한 장에 하루의 일과를 빠짐없이 시간 단위로 적어본다. 그리고 동시에, 일과 중의 자신의 기분을 수치로 (가령, 0-10이나 0-100 점으로, 높을수록 좋은 기분) 옆에 적어놓는다. 이렇게 며칠, 혹은 일주일 정도 기록이 쌓이면 그 기록을 분석해보면 어떤 패턴이 보일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일을 할 때 기분이 덜 좋아지는지, 혹은 나빠지는지.
나에게는, 아내, 딸과 보내는 시간과 운동 다음으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일은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는, 시간을 할애해서 글을 조금씩이라도 쓰려고 노력한다.
이 간단한 방법은 꼭 현재 우울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우울한 기분을 예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막연하게 '글을 자주 써야지'라는 모호한 목표보다는, 수치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가령, '일주일에 브런치에 글 한편 씩 올려야지', '아이가 잠든 후, 10시에서 11 시 사이에, 하루에 십분 정도는 글을 써야지'와 같이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어떤 일을 할 때의 감정/기분 만을 생각한다면, 행동 활성화법은 효과적이기 힘들다. 특히 우울증에 걸렸을 때는 기존에 즐겁게 하던 일들도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을 때만큼의 기쁨을 주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만의 가치(value) 순위를 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중요시하는 가치가 다르다. 이 가치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크게, 일, 학습, 사회 기여, 친밀감, 가족, 우정, 종교, 유희/오락, 건강 등이 있을 수 있다. 이 가치들도 앞서 말한 것처럼 각각에 대해 0-10의 점수를 매겨보면, 자신이 어떤 가치를 더 중요시하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난 후에는, 각 항목을 만족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적어보는 것이다. 가령, 친구가 중요한 사람은, 친구들과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할 때 자기의 기분이 가장 좋아지는지 (예) 친구와 골프를 치기, 수다 떨기, 낚시 가기, 진솔한 대화하기, 등등) 적어보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일주일의 시간표를 가지고, 스스로 어떤 활동들을 할지 계획을 세워보는 것이다. 즉, 스스로의 기분을 좋게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스스로에게 처방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사실 세세하게 들어가면 시도하는 방법은 조금 더 복잡해지지만, 글의 특성상 이 정도까지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다시 나로 돌아와서, 나에게는 가족 (10), 건강 (9), 사회기여 (9), 일 (8)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하루에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제외한 시간에는 내 건강에 도움이 되는 활동 (운동, 산책, 식단 관리 등등)을 우선시하고, 틈나는 대로 글도 조금씩 쓰려고 노력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정신 건강 (9) 뿐 아니라, 나에게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사회 기여 (9) 항목을 미약하게나마 만족시킨다고 생각한다.
행동 활성화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개인적인 이유를 중심으로 썼지만, 내가 글을 쓰는 또 다른 이유는 정신과 질병, 치료에 대한 낙인을 완화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언제나 글을 쓸 때는, 정신과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궁극적으로 자살 예방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의도를 가지고 글을 쓴다. 즉, 글을 쓰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정신 건강과, 기분을 좋게 해 줄 뿐 아니라, 내가 중요시하는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우울증 예방법인 것이다.
이렇게 써보고 나니 내가 엄청 기계적인 사람 같지만, 사실 이런 것들을 다 계산해서 글을 써야지 결정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 활성화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글을 써보게 되었다.
나는 글의 힘을 믿는다. 진심이 담긴 글은 서툴더라도, 명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든 전해진다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에게라도 (정신 건강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든, 없는 사람이든, 환자이든, 환자가 아니든 간에) 내 생각이 와 닿는 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