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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Aug 12. 2020

글의 무게

브런치를 실명으로 바꾼 이유

브런치를 내 이름으로 바꾼 지는 얼마 안 됐다. 익명으로 계속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실명으로 바꾸게 된 계기는 임신 중 단약에 대한 글을 쓴 것이었다. 그전까지 내가 쓴 글들은, 의학적인 조언이 담긴 내용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 익명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없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간에 의학적 조언이나 견해가 담긴 글을 쓴 순간부터는, 익명으로 활동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레지던트 3년 차 첫 응급실 당직 날, 이주일 전쯤 출산한 여성이 불안 증세와 더불어, 말을 엄청나게 많이, 빨리하고, 잠을 며칠 째 자지 못하고 있는 증세로 응급실에 왔었다. 환자를 혼자 본 후에, 당직을 같이 서던 교수님께 환자를 프레젠테이션 하고, 환자를 같이 보러 갔었다. 경조증이 의심되는 상황이었지만, 입원을 할 정도는 아니었고, 간단한 신경안정제와 함께 외래 약속을 잡고, 퇴원을 시키기로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나는 환자에게, 우리의 사고 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고, 우리의 퇴원 후 계획을 차근차근 이야기해주었다. 그리고, 환자에게, 현재 보이는 증세가  '출산 후 호르몬 변화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옆에서 지켜보던 교수님은, 몇 마디 덧붙여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함께 걸어서 응급실을 나오는 길이었다.


교수님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잘했어, 네가 환자에게 차근차근 우리의 생각 과정을 설명해준 건 좋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말이야, 의학적인 견해를 이야기할 때는, 네가 논문이나 연구로 뒷받침할 수 없는 부분을 막연하게 이야기해선 안돼. 네 의사 자격증의 무게를 과소평가하지 마.


혼내려는 뉘앙스는 전혀 아니었고,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단지 머리가 약간 멍해졌던 기억은 난다. 너무나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내가 환자에게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사실 여성 정신 의학에서 임신 중, 혹은 출산 후 호르몬 변화와 정신 질병 증상에 대한 가설들은 존재한다. 단지, 그 정확한 기전을 알기에는 연구가 미흡한 정도이다.



그 후로는, 인터넷이나 실제 상황에서 의학적 조언을 할 일이 생기면, 그 교수님의 진지한 눈빛과 말이 귀에 맴돈다. 유튜브의 홍수 속에서, 의사들도 유튜브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페북도 마찬가지다. 수만 혹은 수십만에 달하는 팔로워들을 거느린 의사 인플루엔서들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종종 글을 투고하곤 하는 정신과 의사들이 주축이 된 인터넷 사이트도 있다.


언뜻 어려울 수 있는 의학 정보를 의학 종사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특히 치료문턱이 높은 정신과에서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신중해야 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치료가 매뉴얼화될 수 없는 정신과 관련 지식들은 더더욱.


임신 중 단약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 또한, 인터넷에서 너무 단정적인, 최신 의학적 지식에 기반하지 않은 정보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가령, 임신 중에는 무조건 단약 해야 한다는 글을 보고, 한 산모가 주치의와 상의 없이 약을 끊어서 병이 재발할 경우, 누가 책임질 것인가? 최소한 의학적 지식을 전할 때는, ‘이것은 보편적인 이야기이고, 각 개개인은 그 환자를 직접 본 의사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니, 담당 의사와 논의하길 추천드린다’는 전제는 깔고 시작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환자가 찾을 사람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제공한 의사가 아닌, 환자를 직접 보고, 약을 처방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임신 중 단약에 대한 내 글을 읽고 약을 계속먹는 것이 능사라고 잘 못 이해해서 담당 의사와의 상의 없이 계속 약을 먹어서 태아나 산모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래서 그 글을 쓸 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으며, 환자들이 해당 정보가 개인에게 하는 의학적 조언처럼 느껴지지 않도록 강조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전문가의 의견이 환자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잘 알기 때문에, 여전히 나는 의학적 조언으로 여겨질 수 있는 글들은 최대한 안 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글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의학적 지식을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이 들면, 최대한 최신의, 그리고 양질의 연구 논문들을 근거 삼아 글을 쓰려고 한다.



사실 나의 경험을 토대로 의사의 예를 들었지만, 어떤 직종이든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바다에 살고 있지만, 정작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전문가임을 표방하며 올리는 글을 쉽게 믿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허점을 이용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자들은 정치, 언론, 사회에 만연하다.


가짜 뉴스는 우리 사회의 큰 문제거리이다 (출처: 매일 경제)

이는 악성 댓글, 카톡 찌라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방송계, 정치계 종사자임을 표방하며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혹은 별 생각없이 복사해서 붙인 내용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아무도 지지 않는다. 단지,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 만이 오롯이 감당할 뿐이다.


내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는 죽을 수도 있다.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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