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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May 06. 2020

임신 중 단약..정말 최선인가요?

여성 정신의학 실습을 마치며

3년 차 때 당직을 서던 당시, 한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정신과 병동으로 전원 되었다. 환자는 임신 중이었다. 조울증 병력이 있었던 환자는 당시 외래 정신과 의사가 임신 사실을 들은 후, 평소 먹던 약을 중단시켰고, 증상이 악화되어, 환청, 망상을 동반한 조증 삽화 중 자살 시도를 하여 중환자 실에 입원했었던 것이다.


졸업 후 진로 선택지 중에는 여성 정신의학 (Women’s Mental Health; 여성의 생애 전반에 걸친 정신 건강, 특히 가임기/임신 중/산후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해 전문화된 정신 의학의 분야) 펠로우십도 있었다. 여러 고민 끝에, 펠로우십을 하지 않는 대신, 4년 차 때 일 년간 여성 정신의학 선택 실습을 돌며 이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사실 인터넷에 의학적 정보에 대해 쓰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다. 정신과의 경우 특히나, 치료에 있어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서 조언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깜냥도 되지 않는 수련의가 조언을 하는 것은 더더욱 무책임한 것 같아, 지양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인터넷에서 잘못된 (혹은 최신의 의학적 지식을 반영하지 못하는) 정보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접한, 수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한 정신과 의사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임신 중에 정신과 약은 당연히 끊는 것으로 생각하며 올린 내용/글들, 그리고 그렇게 전제하고 달린 답변들을 자주 보았다.


정말 임신 중 정신과 약물은 무조건 끊어야만 하는 것일까?


전공을 불문하고, 의사로서 약을 처방할 때는, 약을 먹었을 때 환자가 얻게 될 혜택 (benefit)과 위험성 (risk)을 비교해서 결정을 내린다 (benefit-risk assessment). 즉, 약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 (보통 약의 긍정적 효과)이 약을 복용함으로써 생기는 위험성 (주로 약으로 인한 부작용) 보다 크다는 결론이 설 때에 의사들은 약을 처방한다. 정신과 약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임신부가 정신과적 문제로 방문했을 때는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이 때는, 약을 먹었을 때 약이 태아에 미치는 영향과, 약을 끊을 경우 (혹은 약이 필요한데 처방하지 않을 경우), 질병의 재발, 혹은 악화가 임신부는 물론이고, 태아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한다.


즉, 정신과 약물이 태아에 미치는 위험성과 정신과 약물을 끊었을 때 (혹은, 정신과 약이 필요함에도 처방하지 않았을 때) 환자의 정신 질병이 태아에게 미칠 위험성을 비교해서 약물을 중단할지, 혹은 지속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risk-benefit assessment를 넘어서, risk-risk assessment가 되는 것이다.


임신 중에는 정신과 약물은 무조건 끊어야만 하나요?


결국, 환자의 정신 질병의 중증도, 과거 병력 등에 따라 결정이 달라지게 된다. 증상이 심할수록, 그리고 과거 병력 (약을 안 먹었을 때 재발을 했는지 여부, 재발을 했을 때 입원이 필요했는지 여부, 자살 생각/시도 유무 등등)이 심각할수록, 정신과 약물을 끊었을 때 태아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높아진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임신했을 때 정신과 약물을 끊어서는 안 된다!'가 아니다.


특히 몇몇 정신과 약물 (가령, 조울증 치료제인 valproic acid, carbamazepine이나 항우울제인 paroxetine)은 태아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명백히 밝혀진 약물들이며, 이 약들은 임신한 여성에게 처방해서는 안된다. 단지, (나를 포함한) 의료진과 임신부 모두 흔히, 태아에게 약이 미칠 영향에만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임신부의 악화된 정신 질병이 태아/임신부에게 미칠 영향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심도 깊은 논의가 진행된 후에 약의 중단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환자의 경우, 자세한 내용은 이야기할 수 없지만, 거의 태아를 잃을 뻔했다.


모성 정신의학 연구의 최신 정보들은, 지속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이상,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정신과 의사의 역량과 상관없이, 단지, 이 분야의 연구가 최근에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가령, 정신과 실습이나 정신과 시험에 족보처럼 나오는 리튬 (Lithium)의 경우, 태아에게 엡스타인 (Ebstein) 기형이라는 심장의 이상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임신한 여성에게 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오래 동안 전해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에 의해 이 연관성이 생각보다 훨씬 낮으며, 여러 연구를 종합한 메타 분석 결과, 기형이 발생할 가능성이 유의미하게 높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져서 (1), 정신의학에서 가장 저명한 학술지 중 하나인, 미국 정신의학 학회지 (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서 별도의 사설을 통해 이를 다룬 바 있다 (2). 아마, 앞선 환자의 정신과 의사의 경우도, 리튬 복용을 하는 임산부를 본 순간, 반사적으로 Ebstein 기형이 떠올라서 약을 중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모든 약물에 대해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참고 자료로 사용할 수 있는 사이트는 제공할 수 있다. 정신 약물이 태아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들을 정리한 사이트는 매우 많지만 (대표적으로 미국 국립 보건원 (NIH)에서 운영하는 Lactmed@NIH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501922/); https://mothertobaby.org  (Fact sheet가 운영되어 임신부 입장에서 읽기 쉽게 되어있다); www.reprotox.org (수련의의 경우 무료로 가입 가능하다)) , 그중에서 하버드 여성 정신 건강 센터에서 운영하는 사이트가 비 의료인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가 되어있다 (www.womensmentalhealth.org). 읽기가 부담스럽다면, 담당 정신과 의사와 함께 사이트를 둘러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www.womensmentalhealth.org는 하버드 정신과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사이트이다.


내가 지난 2년간 함께 일한 정신증적 우울증 (우울증 증상과 함께, 망상, 환청 등의 정신증적 증상을 동반하는 질병)을  앓고 있는 한 환자는, 임신 기간 동안의 대부분 시간을 정신과 약을 먹었다. 분만을 하러 마침내 환자가 입원을 했을 때, 나는 몹시 불안했다. 약을 지속한 이유는, 앞서 말한 risk-risk assessment에 따라, 약을 끊었을 경우 환자가 재발할 가능성과 그 증상의 심각성으로 인해 태아에게 미칠 위험성이 약물이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환자의 아이에게 이상이 생기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환자는 임신 중에도, 본인이 불안해서 의료진에게 알리지 않고 스스로 약을 몇 번 중단했다가, 환청, 망상 등의 증상이 악화되어 병원 입원 직전까지 간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어떤 때는 태아를 해치라는 환청도 들었었다). 자문 정신의학 팀을 통해, 환자가 무사히 분만을 했고, 아이가 건강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 보던 환자가 임신했을 경우, 혹은 임신 중인 환자가 처음 찾아왔을 때, 약을 처방하는 것을 꺼리는 마음은 아마 모든 정신과 의사들이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의료적 결정은 최대한 과학적으로 증명된 연구 결과들을 바탕으로 내려져야 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당연히 환자와, 환자를 제일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함께 논의한 후 이루어져야 한다. 단지, 지난 일 년간 배운 경험이 조금이나마 더 깊은 논의를 할 수 있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여 짧게 글을 써보았다.



참고문헌:

(1) McKnight RF et al., Lithium toxicity profile: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Lancet 2012; 379: 721–728.

(2) Bergink V & Kushner SA, Lithium During Pregnancy, Am J Psychiatry 2014; 171 (7): 71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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