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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Sep 02. 2020

도망쳐 간 곳에 낙원은 없었다.

미국 수련 단상

언제부터 미국 병을 앓았을까. 생각해보면, 학부 졸업 무렵이었던 것 같다. 막연하게, 미국에서 초등학교 4학년 한 해 보냈던 기억이 너무 좋았던 (혹은 미화된) 탓도 있었고, 돌이켜 보면, 만화 (슬램 덩크, H2 등등)를 많이 본 탓도 있었던 것 같다.

법규 형 말은 늘 옳다.

어렸을 때부터 메이저리그 야구를 보며 막연히 '큰 물에서 놀아보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밖에 안 나오는)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같다. 어찌 됐든, 나의 막연한 미국병은 의학대학원에 진학하고, 본과 2학년을 마친 후 컬럼비아 소아 정신과에 실습을 오면서 보다 구체화된 아메리칸드림 (미국병의 미화된 표현)으로 진화했던 것 같다.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정신 분석가, 사회복지사로 구성된 팀의 한 시간 여에 걸친 케이스 컨퍼런스를 본 순간, 내 미국 뽕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고, 나는 미국행은 생각에도 없던 아내까지 결국 끌고 미국에 오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뭐가 멋있어 보였을까.

중간에 레지던시를 한번 옮기고, 미네소타에서 뉴욕까지 이사를 오는 등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나는 미국에서 정신과 레지던트 4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요새 한국 의료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미국에서 수련을 문의하는 글을 자주 보는데, 그중에 진지하게 미국 레지던트 수련을 생각하는 한국에 있는 의대생/의사 분들에게 혹여나 도움이 될까 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


1. 유학이 아니라 이민이다 (궁서체로 쓰고 싶었으나 폰트가 없다).

처음 미국 레지던트 지원을 준비할 때에는, 막연하게, 레지던트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마치 박사과정 유학 가는 것처럼. 이는, 의학이란 용어는 만국 공통이지만, 의료는 각 나라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나의 착각이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가서 훌륭한 업적을 내고 잘 적응하는 분도 있겠지만, 보험 체계, 의료법, 의료 시스템 등 의료 행위와 관련된 모든 부문에서 미국은 한국과 완전히 다르고, 이에 적응한 의사들은 결국 대부분 미국에 남아 살게 된다. 처음부터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레지던트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 한국 수련 경험 없이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다.

 

2. 사람 사는 곳은 다 다르다. 그리고 동시에, 다 똑같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미국에 수련받으러 간다고 하면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이 있었다.


미국 가면 뭐가 다를 것 같아?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아


학부 때 심리학이라는 사회과학을 공부한 나에게, 사회과학의 전제 조건인 환경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듯한 말로 들렸고, 그래서 더 반감이 컸던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다르다.


한국과 미국은 엄연히 다르고, 사람 사는 곳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주 별로 사람 사는 것은 정말 다르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뉴욕-서울의 차이보다, 뉴욕-미시시피의 차이가 더 클 것이다.


다만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간에, '나'라는 변수는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국에서 쉽게 불만을 느끼고, 예민하게 반응하던 내 촉수가, 미국에서는 좀 무던해질 거라 착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의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판타지와는 달리, 미국은 미국 만의 부조리가 무수히 존재하는 곳이었고, 미국에 대해, 한국에 있었을 때처럼 쉽게 투덜거리는 나를 발견했다.  


한국이 싫어서  사람은 미국에서도 싫은 점을 발견하기 쉬울 것이다.


3.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군대에서 흔히, 보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임이 누구냐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마찬가지로 주변 환경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 아내가 없었으면 나는 미국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국이냐 미국이냐 보다, 궁극적으로 누구와 함께 있느냐 인 것 같다. (아내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


혹자는 이민자로서 비주류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이민자로서의 설움은 미국에서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내가 섣불리 미국행을 추천하기 망설여지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한국에 있었다고 딱히 주류였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 나는 이민자로서의 경험들이 내 삶을 더 풍요롭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소수자로서 사는 경험은, 사회의 다른 소수자 (성 소수자, 소수 민족, 타인종 등등)들을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계기로, 나는 더 좋은 정신과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미국에 간다고 했을 때, 또 하나 자주 들었던 말은 "야 가봐야 결국 다 한인타운에서 개원한다더라"였다. 성공한 미국 의사는 맨하탄에서 백인 환자만 보며 사는 의사인가? (사실, 그런 직장을 구하는 것은 생각과는 달리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 보며 일한다는데, 그걸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은 아마 마음속 깊이 인종에 대한 편견이 강하게 사로 잡힌 사람일 것이다. 미국에서 영어 외의 다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은 크나큰 장점이다. 그리고, 지역 사회에 기여하는 것 (혹은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은 이 곳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당장 나부터도 미국에서 한국 의사가 아닌 사람을 찾아가 본 적이 없다. 내가 정확히 어떤 환경에서 나중에 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인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나의 작은 목표이기도 하다.


나에게 "다시 4년 전으로 돌아가면, 미국에서 레지던트 할래?"하고 누가 물어본다면, 그래도 나는 미국에 오겠다고 말할 것 같다. 다른 모든 이유는 사실 부차적이고, 가족과 보낼 수 있었던 시간이 나에게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난 이런 이유로 미국에 온건 아니다.

다시 미국병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최첨단의 미국 의학을 배우고 싶은 열망보다는, 가족 중심의 삶을 살고 싶어서 미국에 오고 싶었던 것이 컸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보니, 미국이 의학의 최첨단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환상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미국 생활을 하면서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 또한, '늘 가족이 먼저'이고 '의사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직업일 뿐'이라는 마음가짐이다.


수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나와 아내는 다행히도 떨어져 지내지 않고 레지던트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동시에 수련받는 커플 중에서 롱디를 하는 경우가 꽤 많다 - 커플이라면 이 또한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생각한 만큼 레지던트 기간이 여유롭진 않았지만, 그래도 레지던트를 하는 동안 거의 매일 저녁을 아내와 딸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들에 감사한다.


앞서 메이저리그를 이야기했었지만, 내가 메이저리그를 통해 미국에 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미국이라는 '큰 물 (?)'에서 노는 박찬호나 김병현이 멋있어 보여서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대기록 작성이나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를 목전에 둔 선수들이나 아내의 출산을 함께하기 위해 경기를 빠지는 행동이나, 선수들의 말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가족 중심 문화가 너무나 부러웠었기 때문이었다 (막상 와보니 한국보다 육아 휴직 제도가 더 안 좋단 건 함정..). 돌이켜보면, 어릴 적 메이저리그 최고 투수 중 하나였던 톰 글래빈이 월드시리즈 문턱에서 패배한 후, 기자들이 그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대답이 나의 미국 뽕의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힘든 이민 생활을 버텨나가는 힘이 되어주곤 한다.


“이건 죽고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게임일 뿐이다 (It’s not about life or death - it’s just a game). 오늘 패배는 쓰라리지만, 나는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여전히 내 딸아이의 포옹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겐 그것이 어떤 야구 경기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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