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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Sep 06. 2020

블랙 펜서가 한국에 살았다면

미국의 의료제도에 대한 단상

우리에게 블랙 팬서로 더 친근한 미국의 배우, 채드윅 보스만이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 세계의 팬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를 추모하는 마지막 트윗은 역대 트위터 게시물 중 가장 많은 좋아요를 기록했다. 미국에서 인종간 갈등이 극에 치달은 요즈음, 최초의 마블 흑인 슈퍼 히어로였던 블랙 펜서를 잃은 빈자리는, 여느 때보다 크게 느껴진다.


채드윅 보스만의 마지막 트윗은 트위터 역사상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게시물이 되었다. (출처: 채드윅 보스만 트위터)


그의 죽음은 또 다른 시사점을 제공했다. 바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서 점차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대장암이다. 많은 기사들이 앞다투어 사람들에게 대장암의 위험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의사들은 조기 검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들어보면 매우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내 머릿속에는 질문 하나가 계속 떠나지 않는다.


지금 미국의 의료 시스템 하에서, 그게 가능할까?


한국에서는 대장 내시경의 경우, 가이드라인은 마흔 살부터 가족력을 가진 사람에 한해 권고하지만 워낙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30대들도 마음만 먹으면 쉽사리 받을 수 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내 가족과 친구들 중 상당히 많은 수가 30대 초중반에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 그중에 어떤 이들은 나중에 암으로 진행될 수 있는 용종들을 조기 발견하여 제거하기도 했고, 또 소수는 대장암을 진단받기도 했다. 그리고 수술 및 항암 치료 등을 거쳐, 이제는 암이 완치되어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반면에, 미국에서 30대가 건강 검진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주치의를 만나서 피검사를 하면 다행이다.


물론, 채드윅 보스만이 대장 내시경을 할 돈이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그리고, 그가 설령 더 어린 나이에 대장 내시경을 받았다고 해서 살아있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주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가 한국처럼 의료 접근성이 높은 나라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미국에선 돈이 많건 적건, 워낙 병원 방문의 장벽이 높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많은 배우라 해도, 대장 내시경을 아무 이유 없이 30대에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미국의 병원 문화니까.


미국에서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병원을 가는 것을 생각도 못한다. 실제로, 딸아이가 한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다 함께 캘리포니아로 놀러 갔던 적이 있다. 거기서 딸아이가 갑작스럽게 의식이 흐렷해지고, 자꾸 처지는 증상을 보였었다. 덜컥 겁을 먹은 우리는 주변의 병원을 수소문해보았다. 그때 내 머리에 가장 먼저 스쳐간 질문이 있었다.  

지금 응급실 가면, 내 보험으로 커버가 될까?


비단 그때뿐 아니라, 가족 중 누군가 몸이 아플 때면, 가장 먼저 드는 질문은 늘 똑같다. 지금 응급실 갔다가 나중에 진료비 폭탄을 맞는 게 아닐까? 나는 의료인으로서, 병원에서 제공하는 좋은 보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미국의 응급실 문턱은 너무나도 높다. (출처: Brigham and Womens Hospital)


미국은 코로나 바이러스 대응을 통해, 스스로 사실상 공중 보건 체계가 없음을 증명했다. 나는 미국에서 공중 보건 석사를 하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미국이라는 공중 보건 체계가 없다시피 한 나라에 공중 보건을 배우러 오는 건 참 아이러니지 않은가. ' 미국은 분명 의학 연구와 기술에 있어서는 세계 최강국이지만, 의료 시스템에 있어서는 한국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을 일 년 만에 느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가장 먼저 직격탄으로 맞은 건 뉴욕시였다. 뉴욕시의 모든 병원들은 거대한 코로나 바이러스 중환자실로 변했고, 2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나마 뉴욕시는, 내가 알기로 미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공 병원 시스템이 존재하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뉴욕은 뉴욕시에서 운영하는 공공 병원이 11개 존재한다 (New York City Health + Hospitals). 이 병원 들은 맨해튼을 비롯해서 퀸스, 브루클린, 브롱스 등에 걸쳐 골고루 분포하며, 저소득층 환자들을 대상으로 주로 운영된다. 각 병원 들은 뉴욕 시의 의과 대학들과 연계가 되어있고, 이 곳에 일하는 전문의들, 레지던트들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공공 병원에서 근무한다.


나는 공공 병원들 중에서 뉴욕대와 연계된 벨뷰 병원에서 일하곤 했었는데, 그곳은 노숙자 (홈리스)인 환자들이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의료 보험도 당연히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이들이 미국의 천문학적인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들의 치료비는 오롯이 시의 재정에서 나가는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최전선에 서 있었던, 뉴욕시 공공 병원 중 하나인 퀸스의 엘름허스트 병원 (출처: 뉴욕 타임스)


레지던트 기간 내내, 나는 뉴욕시의 공공 병원들의 역할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았고, 이는 뉴욕에 거주하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자부심이었다. 나는 뉴욕시가 그나마 병원 시스템이 붕괴되지 않고 코로나 바이러스의 피크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공공 의료체계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미국의 다른 지역처럼 공공 병원이 전무한 곳이었다면 아마 도시 자체가 붕괴되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의사들은 참 많이 미움을 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 한국만큼 의료 접근성이 높은 나라도 없다. 보스만의 죽음과 대장암에 대해 다루던 한 기사에서 이런 꼬리를 본 적 있다. 본인은 대장암인 30대 아들을 둔 어머니인데, 아들의 대장암을 진단받기 위해 실시한 대장 내시경에 1500 불 (현재 환율로 환산 시, 약 180만 원)이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보스만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던 비행기에서였다. 영화 <42>에서, 그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였던 재키 로빈슨 역할을 맡았었다. 그리고 그 후의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능력을 증명한 그는, 재키 로빈슨처럼 수많은 장벽들을 넘어서, 최초의 흑인 슈퍼히어로의 역할까지 맡을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들이 있었을까.  블랙 팬서로 미국 배우 조합상 (Screen Actors Guild Awards) 앙상블 상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작품의 배우들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기생충 배우들이 받아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졌다)을 수상했을 때, 블랙 팬서의 주축이었던 흑인 배우들과 단상에 올라선 보스만은 말했었다.


"젊고, 재능 넘치는 흑인들로서, 우리는 알아요" (출처: Variety)


"젊고, 재능 넘치는 흑인들로서, 우리는 알고 있어요. 우리에게, '네가 여기에 설 자리는 없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어떤 기분인지요. 젊고 재능 넘치는 흑인들로서, 우리는 알아요. '스크린에 네 자리는 없어', '네가 설 수 있는 무대는 없어'라는 소리를 듣는 기분을요. 우리는 알아요, 머리가 아닌 꼬리가 되어야만 하는 기분을요. 우리는 알아요,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어야만 하는 기분을요. 저희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매일 촬영에 나섰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알았거든요.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고 싶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요. 우리가 우리가 맡은 역할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우리가 꿈꾸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요."


너무나 갑작스럽고, 안타까운 죽음이어서, 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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