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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Nov 03. 2020

살기로 '결정'하라고 하지 말고, 병원에 같이 가주세요

박지선 씨의 죽음 앞에서, 작가인 허지웅 씨는 자신의 책 구절을 발췌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하고 싶다. 죽지 못해 관성과 비탄으로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기로 결정하라고 말이다.


허지웅 씨의 글은 따뜻한 글이었고 (나는 그의 글을 매우 좋아한다), 그가 진심으로 우울의 늪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함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그가 과거에 암과 투병을 하면서, 침잠하는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되뇌던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조금 다르게 부탁드리고 싶다.

 

죽을 의지로 살라고 조언해주는 대신, 병원에 같이 가자고 말해보자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가장 확실히 손 내미는 방법은, 같이 병원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울증의 증상이 하나도 없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살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우울증을 함께 가지고 있다 (자살 생각은 우울증의 한 증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 것만 같은 삶을 살기로 '의지'로 '선택'한다거나, '결정'하라고 하는 것보다는,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함께 (처음에 특히 내디디기 힘든) 발걸음을 내디뎌 주는 건 어떨까.


미국에서 정신과 응급실에서 일하며 수많은 환자들을 만났다. 한국 응급실의 현실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의 경우 정신과적 문제로 응급실에 오는 경우는 꽤나 많다. 그리고 정신과적 문제로 응급실에 오는 가장 흔한 원인 중의 하나는 환청도, 망상도, 약물 중독 문제도 아닌, 바로 '자살 생각'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자살 생각이 들면 응급실/정신과에 가야 한다는 공식은 꽤나 보편화되어 있다. 자살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흔히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오곤 했다. 자살 생각은 지속적으로 머무는 경우도 있지만, 밀물처럼 들어왔다가 다시 쓸려 나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물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자살 생각이 들었을 때, 혹은 자살 생각에서 자살 시도로 이어지는 순간순간들에 누군가가 잠시라도 개입할 수 있다면, 자살로 사망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이는 박지선 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지금 이 순간 우울증 및 정신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는 글이다. 나는 미국에서 일하는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에, 한국에 아무리 많은 환자들이 정신과를 가도 나에게 경제적 이득이 되는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전에도 말했듯이, 계속되는 우리 사회의 자살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너무나 큰 슬픔이며, 트라우마이다. 지금이라도, 정신건강, 우울증, 자살에 대해 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고, 자살을 극단적인 '선택'이라 치부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떳떳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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