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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Jul 12. 2020

그녀들에게도 공감해주세요

 故 박원순 시장의 죽음 앞에서

제 해마 (뇌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부위)에 영원히 각인되어있어요. 그 날의 그 웃음소리가. 저를 농락하며 친구와 웃던 웃음소리요.


2018년, 브랫 캐버너 (Brett Kavanaugh)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미국의 대법관 후보로 지명되었을 때, 크리스틴 블레이시 포드 (Christine Blasey Ford) 교수는 캐버너가 고등학생이던 당시, 어떻게 파티에서 자신을 성폭행하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청문회에서 증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녀의 등장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는데, 우선,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기억에 대해서 전문적 과학 지식을 바탕으로, 똑 부러지게 증언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너무나 "호감형(likeable)"이었기 때문이다. 팔로알토 대학의 임상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지적이고, 예의 바른, 매력적인 중년의 백인 금발 여성의 증언은 많은 사람에게 공명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만약에 그녀가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왜 피해자로서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 기울이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인 것을 증명해야만 했을까.

블레이시 포드 교수가 청문회에서 선서하는 장면 (출처: TIME)

브렛 캐버너의 청문회가 진행되던 한 주는, 트라우마를 경험한 나의 여성 환자들에게 매우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어렸을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했던 한 환자는, 본인의 트라우마가 계속 생각난다며 고통을 호소했고, 파티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한 여대생 환자는, 우울감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몇몇 환자는 공황 발작을 호소하며 응급실에 오기도 했다. 실제로 의학에서 가장 저명한 학술지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 하버드의 일차 진료 교수가 캐버너 청문회로 인한 트라우마 환자들의 고통 호소에 관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걱정한다. 박원순 시장의 자살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방식이, 고인을 고소한 피해자 여성에게, 그리고, 비슷한 경험을 가졌을 (남녀를 불문한) 한국의 수많은 성폭행/성추행 피해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트라우마는 빈번하며, 트라우마 희생자의 절대다수는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했던 환자들은, 그들의 트라우마와 비슷한 경험을 접하는 경우, 트라우마를 재경험하기도 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 심할 경우 자살 생각을 호소하기도 하고, 자살 시도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캐버너 청문회 당시, 미국의 수많은 피해 여성들은 포드 교수에게 찬사를 보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한 그녀의 용기에 대해서, 그리고 전국에 생중계되는 청문회에서 본인의 이름과 얼굴, 직함을 걸고 목소리를 낸 담대함에 대해서. 그것이 캐버너 청문회의 후폭풍 속에서 피해 여성들에게는 한줄기 빛이었다.


정신과 의사 앞에 앉은 환자들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본인의 가장 어두운 경험을 털어놓는다. 평생 혼자만 간직해온 비밀들을. 이는 정신과 의사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특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특권은, 정신과 의사들은 언제나 환자들의 편에 서줄 거라는 믿음에 기반한다. 이는 동시에, 정신과 의사에게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특권에는 늘 커다란 책무가 따르기 때문에.  


출처: SBS, 7월 10일 자,  "박원순 추모" vs "성추행 의혹 꼭 조사"… 갈라진 목소리


그래서, 부탁드린다.  故 박원순 시장이 느꼈을 인간적 고뇌와 고통에 공감하는 마음으로, 피해 여성의 마음도 헤아려봐 달라고.



한 소시민이, 서울 시장이라는 거대 권력을 고소하는 데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뤘을지에 대해서. 그리고 고소장이 접수되자마자 피고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을 때, 그녀가 느낄 충격이 얼마나 클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어버리자고 했을 때,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음을 기리는 방식이, 그녀에게, 그리고 모든 성추행 피해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에 대해서.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 진심으로 그녀의 안위를 걱정한다. 부디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지 속에서 이 시련을 견디고 있기를 바란다.


나는 자살과 그 유가족에 대한 낙인이 사라지는 날을 늘 꿈꾼다. 하지만, 동시에 자살이 미화되는 것에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실제로, 자살을 명예롭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는 자살률을 높이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자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유일한 탈출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자살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포장되고 모든 것의 면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는 지양해야만 한다. 이는 언론의 자살 관련 보도지침 일 순위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는 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해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그녀와 같은 피해자들이 좌절감을 느끼지 않도록 돕는 것이, 정신과 의사로서의 도리라 생각하여 글을 쓰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 여성 인권의 향상에 큰 기여를 한 인권 변호사로서의 박원순 씨의 유지를 받드는 길일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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