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페이스 북에서 현재 전공의 수련을 받고 있는 한 동기의 글을 보았습니다. 저의 의과대학 졸업 동기들은 현재 인턴보다도 힘들다는 레지던트 1년차 과정에 있습니다. 그 친구가 쓴 글이 제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처음 의사가 되었을 때의 마음과 달리 의욕도 떨어지고, 제대로 노력하지 못하는 본인이 한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한국의 인턴, 레지던트들은 주당 평균적으로 100시간 이상을 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한 전공의협의회 조사 결과).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하루에 평균 14시간 이상을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업무라는 것이 단순한 작업이 아니고, 환자의 건강, 더 나아가 생명과 직결되는 고강도 스트레스를 받는 업무들임을 감안할 때, 이는 살인적인 수준입니다 (수련의들 뿐 아니라, 환자들에 게도요). 그와 같은 환경에서 초심을 잃지 않고 계속 열정적으로 근무를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워낙 성실하고 똑똑한 어린 친구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사실이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이 친구뿐일까요? 사실 저는 이 말을 한국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심리학 용어 중에 귀인(attribution)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심리학자인 하이더(Heider)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사람들이 자기 주변의 일들, 그리고 자신의 일이 발생한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성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우리는 자연스레 ‘왜 그럴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 친구가 왜 나한테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왜 나에게 이런 행운이 찾아온 걸까?’ 그렇게 문제의 원인을 찾는 행위를 귀인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아무 원인이 없이 발생한 사건에서조차 사람들은 귀인을 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귀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외부 귀인과 내부 귀인. 즉, 문제 혹은 사건의 원인을 내가 아닌 밖에서 찾느냐, 아니면 안, 즉 내 안에서 찾느냐에 따라 전자는 외부 귀인이 되고, 후자는 내부 귀인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외부 귀인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 내부 귀인하는지를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연구결과, 사람들은 자신에게 긍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내부 귀인을 하고 (즉, 내가 잘 된 것은 ‘내가’ 잘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부정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외부귀인을 하는 (잘못된 것은 내가 아닌 남, 또는 주변 환경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여기까지 들을 경우, 내부 귀인을 하는 사람이 외부 귀인을 하는 사람에 비해 더 성숙한 사람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울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스스로의 불행한 결과를 내부 귀인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나의 실패를 ‘내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 치환하는 사람과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내가 머리가 나빠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우울감을 느낄지는 어찌 보면 자명해 보입니다.
저는 오늘날의 한국 젊은이들에게서 앞서 말한 경향성 (잘되면 내 탓, 잘못되면 남 탓을 하는 경향)과 정반대의 결과를 자주 보곤 합니다. 즉, 내가 취직이 되지 않은 이유는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이고, ‘내가 스펙이 부족해서’라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입니다. 대기업 입사를 위한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 넘어가고, 공무원 시험에 박사학위 자부터 50대 사기업 은퇴자까지 모두 몰려들어 피 말리는 경쟁을 함에도, 그들은 스스로를 탓합니다. 주당 10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번아웃(burn out)이 되었음에도, 왜곡된 의료 시스템보다는 본인의 나약함을 탓합니다. 육아 전쟁에 시달리는 젊은 엄마 아빠들은 밥먹듯이 야근을 하면서도 자식에게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못한다며 스스로를 탓합니다.
왜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 그들의 탓일까요? 먹고사는 터전을 마련해주어야 할 사회가 부모 노릇을 하도록 놓아주지를 않는 것을.
저는 이러한 경향성이 한국의 높은 자살률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10만 명 당 30명가량이 자살로 목숨을 잃습니다. 사실, 이 수치만 듣고서는 이것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단적으로, 미국의 자살률은 10만 명 당 13명가량 됩니다 (미국도 자살률이 요새 증가 추세여서, 뉴욕 타임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큼 경각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비슷한 경제 수준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높지도 낮지도 않은 평균적인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을 흔히 한국에 비해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 ‘위험한 나라’, ‘언제든지 총에 맞아 죽을 수 있는 나라’라고 합니다. 이러한 미국의 타살률, 즉 의도적인 살인으로 사망할 확률은 10만 명 당 3명이 조금 넘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미국의 자살률과 타살률을 합친 결과의 두배에 달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실패에 비관한 젊은이들은 고시원에서 조용히 목숨을 끊습니다. 그들은 사회에 분노할 여유도, 이유도 없습니다. 내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은 나의 탓이고, 그렇게 나는 부족한 사람, 남에게 짐만 되는 사람이 됩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진 젊은이들을 위한다며 수많은 책들이 ‘힐링’을 표방합니다. ‘미움받을 용기’는 이 시대를 대변하는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말은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이 그들의 아픔을 정당화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멈추면 뒤로 나자빠지는 트레드밀과 같은 사회 구조에서 젖 먹던 힘을 다해 버티는 젊은이들에게, '힘들 땐 쉬어도 괜찮아'라는 말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의 자살률은 지금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입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은, 개개인의 노력 부족 때문이 아닌,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그것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현 사회 구조를 설계한 세대의 몫일 겁니다. 저는 여기서 '내 탓', '네 탓', '젊은이 탓', '기성세대 탓'하며 귀인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현재 한국의 상황은 화살을 사람 안으로 돌리기보다는, 사람 밖으로 돌려야 하는 시점이며, 그것이 사회 구조를 개선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 답답합니다. 해결책은 앞으로 한국 사회를 살아갈 우리 모두의 몫이겠지요. 그리고 이 사회 구조가 누구의 책임이냐를 떠나서, 결국은 저를 비롯한 청년세대가 풀어야 할 숙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현재로서는 우선,
네 잘못이 아니야
이 한마디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자책하기보다는, 다 같이 잘못된 것이 있음을 인정하고, 어떻게 고쳐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처방은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겠죠. 그것이 바로 이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공부하는 공중 보건학에 몸담는 사람들의 책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공중보건학에 앞서 정신과를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정신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조기에', '떳떳하게'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복잡하고도 심오한 문제를 '정신 질병에 대한 우리 사회의 낙인 해소'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