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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Dec 07. 2020

배반하는 노력에 대하여

영화 <힐빌리의 노래> 감상

숨을 잠시 참아보세요. 10초, 20초, 30초...


처음 중독 정신과 펠로우십 프로그램에 들어왔을 때, 한 수업에서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곤,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힘들다, 이러다 죽겠다 생각했어요"

"숨을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산소, 산소가 필요해요"


교수님은 우리에게, 방금 우리가 느꼈던 기분이 중독 환자들이 약물에 대한 금단 현상을 보일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리고 여러분이 머릿속에서 외쳤던 '산소'가, 중독 환자들에겐 '약물'이라고 했다.

그 비유를 들은 순간, 중독 환자들에게서 이해가 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자기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환자들이, 자식들과의 굳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다시 약물에 손을 대곤 했는지.

중독 환자들은 반복된 약물 사용으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곤 한다 (출처: helpguide.org) 

교수님은 말했다. 지금 산소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는 산소가 아닌 것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고. 


넷플릭스를 통해 최근에 공개된 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힐빌리'란, 미국의 시골, 특히 아팔라치아 산맥 남부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해서 일컫는 말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인공과 같은 잠재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는 오하이오의 작은 마을에서 성장해서, 현재는 예일대 로스쿨에 다니며 대형 로펌들에 인터뷰를 다니는 주인공, J.D. 반스(Vance)의 현재에서 시작한다. 오하이오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고, 해병대에 입대한 후, 주립대를 거쳐 예일대 로스쿨에 진학한 그는, 로펌 파트너들과의 저녁식사에서 자신 앞에 놓인 수많은 포크와 나이프들 앞에서 어느 것을 먼저 사용할지 조차 알지 못하는, 말 그대로 '개천에서 난 용'이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누나의 전화를 통해 엄마의 약물 과복용으로 인한 입원 소식을 접하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이야기이다.  


반스의 엄마는 극 중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아편계 진통제에 중독된 환자로 나온다. 엄마로 인해 청소년기에 불안정한 가정생활과 빈곤으로 방황하던 반스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알아봐 준 할머니의 훈육 덕분에 스스로를 다잡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탄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그 시절 휴먼 스토리들의 클리셰를 그대로 반복한 탓도 있겠지만, 요새는 이런 자전적인 영화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는, 세대 전이되는 트라우마와 중독에 대해 나름 잘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무난하게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영화 평을 찾아보니 혹평 일색이었다. 영화가 기초로 한, 베스트셀러였던 동명의 자서전이 존재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영화, 그리고 자서전에 대한 비판의 주된 이유는 바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러스트 벨트 지역의 빈곤, 마약 문제 등등)를 단순히 개인의 인간승리로 치환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저자가, 그러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뒤쳐진 사람들의 문제 또한 개인의 게으름이나 부족함으로 치부해버린다는 점이었다.  

영화는 주인공인 반스가 살아온 인생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출처: The New Yorker)


흙수저, 개룡남,,,


우리 사회에 이런 말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이기 시작한 지도 체감상 십 년이 넘은 것 같다. 그만큼 한국이든 미국이든 현대 사회의 계층 사다리는 사라진 지 오래다. 간간히 반스처럼 들려오던 흙수저의 성공담도 이제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것만 같다. 그런 2020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마치 응답하라 1988이라든가, 1994를 보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었다.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 


한 때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모자 안 쪽에 적어놓아서 화제가 되었던 이 문구는, 방황하던 이십 대의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삼십 대 후반이 되어 접한 이 구호에서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느껴진다.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을 만날 때마다, '더 겸손해져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정신 의학이라는 학문의 깊이를 실감하거나, 현대 정신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과 정신 질환에 대해서 여전히 아는 것보다 모른 것이 훨씬 많다는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하지만, 그보다도, 다양한 환자들의 삶의 여정을 들을 때 보다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뉴욕대 병원 입원 병동에서 만났던 한 흑인 여성은, 명문대를 나온 변호사였지만, 삼십 대가 넘어서 뒤늦게 발병한 조현병으로 모든 걸 잃었다. 자기 딸에게 자신의 정신과 약을 먹이라는 환청을 듣던 그녀는, 급기야 자신의 딸의 음식에 항정신병약을 타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연스레 자식의 양육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 이후로 노숙자가 되어 수많은 정신병원을 전전하게 된 그녀의 삶은, 앞서 말한 명제를 전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벨뷰 병원에서 만난 한 백인 남성은, 내로라하는 회사의 임원으로서 맨하탄의 부촌에 고급 아파트를 여러 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깊은 우울증의 수렁에 빠진 이후로, 직장은 물론, 모든 재산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었다. 처음에 그를 인터뷰했을 때, 나는 그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그를 치료했던 정신과 교수를 통해,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것을 듣고 충격에 빠졌었던 기억이 난다.  

미국의 수많은 노숙자들 중 많은 수는 정신 질병을 가지고 있다 (출처: SF Chronicle)

여기에 중독으로 인해 삶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은 정말 수도 없이 봐왔다. 한국에서 마약중독자의 이미지는 조금 다를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만나는 수많은 중독 환자들은, 평범한 삶을 살다가 수술 후 마약성 진통제를 의사에게 처방받은 후, 중독된 경우 또한 비일비재하다. 이 외에도, 갑자기 닥친 건강문제, 경제 위기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진 사람들 또한 수없이 만났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인 '성공'이란 것이 얼마나 신기루 같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 이상 와 닿지 않는 데에는, 앞선 환자들과의 만남들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왜냐면, 그 명제 ('진정 열심히 산 사람은 성공한다')의 반대급부에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편견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말콤 글레드웰의 <아웃 라이어>는 한국에서는 '만 시간의 법칙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만 시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법칙)'이 주 메시지인 것 마냥 홍보되었지만, 실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운'과 '시기'가 잘 맞아떨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여러 사례로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성공을 예측하는 가장 큰 변수는 다름이 아닌, '부모의 직업'이라 말한다. 책이 나온 지 10년 여가 지난 지금은, 아마 더 그러하리라 생각된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 옛말에 운칠기삼이라는 말이 있지만, 나는 운이 우리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그 이상이라 생각한다. 반스의 경우, 전교에서 2등 졸업을 한 엄마만큼 출중한 지능과, 눈물겨운 할머니의 훈육이 있었지만, 그러한 혜택조차 받지 못한 대부분의 친구들을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당장 반스의 엄마의 인생이 노력 (고등학교 시절의 노력)과 재능 (우수한 머리) 두 가지 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준다.   


글을 쓰다보니, 주인공에 대한 비판처럼 글이 흘러갔는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반스에게 감명받았다. 그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지, 나같이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기에, 같은 (혹은 겉보기에 유사한) 상황이었던 주변 사람들을 '게으르다'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그의 심리 또한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반스와 같은 성공한 삶을 인정하는 것이, 낙오자로 보이는 사람들의 삶을 이해 못하거나 업신여기는 것으로 귀결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 인생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것. 그것이 내가 환자들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배운 한가지이다.    


그리고 혹여나, 지금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좌절하고 있는 분들 중에,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함을 탓하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써보았다. 그들이 내 상담실에서 앞에 앉아있다면, 그렇지 않다고, 세상에는 결실로 맺어지지 않는 노력도 많다고. 당신 탓이 아니라고. 그렇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힐빌리의 노래>가 평가가 엇갈리는 이유는, 아마 극 중의 반스의 엄마의 행동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독 정신과 의사로서 보는 그녀는, 내가 매일매일 보는 환자들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힐빌리의 노래>에서 약물 중독 환자 연기를 하는 에이미 아담스

흔히 중독 환자들의 뇌를, 하이재킹 (hijacking) 당했다고 표현한다. 중독과 관련된 우리의 뇌 부위는, 너무나 원초적인 생존과 관련된 부위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의 늪에 빠지는 순간, 의지만으로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약물에 중독되기까지의 환자의 삶에 대해 들여다보지 않고, 약물 중독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는 것은 환자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다. 


중독 정신 의학과 펠로우를 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바로 중독 환자들에게 더 잘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인 것 같다. 중독 환자는 정신과 의사들에게 조차도 가장 다루기 힘든 환자들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보면 나도 정신과 레지던트 때 그랬다. 중독 펠로우도 어느새 전환점을 돌고 있는 이 시점에, 남은 6개월이 더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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