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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Oct 20. 2020

<모아나> 예찬론

타인을 내 잣대로 평가하지 않기

우리 딸내미의 크레파스 통 안에는 유독 짧은 크레파스가 두 개 있다. 짙은 갈색과 검은색이 그 주인공이다.

다 닳아버린 딸내미의 갈색과 검정색 크레용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의도치 않은 전업 육아를 할 당시, 때마침 등장한 디즈니의 스트리밍 서비스는 우리 부녀의 한줄기 빛이었다. 딸내미와 나는 미키마우스 시리즈 정주행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최근 디즈니 영화는 거의 다 섭렵했다 (이러니 내가 쓰레기 아빠 같지만, 하루에 평균 한 시간 이상은 안 봤다). 덕분에 한 이십 년간 놓쳤던 디즈니 영화들을 다 따라잡기도 했다.


사실 디즈니 플러스를 처음 시작할 때에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디즈니의 스테레오 타입인 비현실적 몸매의 백인 (금발) 여자들이 나오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잠시 걱정을 하기도 했었다. 이건 내가 프로 불편러여서가 아니라, 육아 선배들이 실제로 아이들이 디즈니 영화들을 본 이후에, 자기 얼굴을 그리면서 머리를 노란색으로 칠한다든가, 자기 머리가 노란색이라고 말한다든가, 또는 왜 자기 머리는 노란색이 아니냐고 묻는 등의 경험담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딸아이도 아마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겨울 왕국>이 처음 본 영화였던 것 같다. 한동안 엘사에 푹 빠져서 작년 크리스마스 선물도 겨울왕국 장난감으로 골랐었다. 엘사 옷을 입은 딸아이는 내 눈에는 누구보다 예뻐 보였지만, 마음 한 구석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던 기억.


하지만, 그런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타자로 본 영화였던 <모아나>를 본 이후로, 우리 딸아이는 모아나에 완전히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원래 집에 있던 <티아나> 책도 더더욱 탐독하게 됐는데, 그 이후로 신기한 현상이 벌어졌다. 우리 딸아이가 그리는 그림마다 다 얼굴을 모조리 갈색으로 칠하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칠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아나는 순식간에 우리 딸아이의 최애 영화가 되었다. (출처: 디즈니)

 한참 심할 때는 엘사나 애나라든지, 인어공주 아리엘이나 미녀와 야수의 벨도 알굴을 갈색으로 칠하곤 했다. “피부는 갈색이니까”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아시아인들의 피부색은 사실 갈색에 더 가깝다)


그럴 때마다, 디즈니에서 모아나, 티아나를 만들어준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후에 뮬란 만화도 봤는데, 한동안 참 좋아라 했다.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자라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내가 미국에서 정규 교육을 받아본 것은 고작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해가 전부다. 그 당시에, 나는 딱 한번 싸움이란 걸 해봤는데, 한 백인 아이가 나와 멕시칸 친구가 농구를 하고 있는데 시비를 걸며 나에게 “중국인 꼬맹이”라고 놀린 게 싸움의 발단이었다. 일 년 후에 한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경험할 순 없었지만, 아이들이 더 짓궂어지는 사춘기에는 아마 더 상처 받는 일들이 많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소수 인종으로서의 차별을 경험할 일은 없었다. 한국에서 모범생인 한국인 남자로 사는 경험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 당시에 전혀 못 느꼈었지만, 난 한 사회의 주류인 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게 평생을 동일한 인종이 대다수인 곳, 그리고 사회의 가치관이 덜 다양한 곳에서 살아온 내가 서른이 넘어 미국에 건너와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충격적이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법'이었다. 가령, 하버드에서 성전환자들을 비롯한 모든 성별에게 열려있는 화장실을 처음 봤을 때라든가, 미네소타에서 간 인턴 환영식에서 남편과 함께 온 남자 교수가 나에게 남편을 소개해줄 때 라든가. 나는 처음 맞이하는 상황들 앞에서, 놀라지 않은 척하며 자연스럽게 대처하려 최선을 다했었다.

하버드의 모든 성별에게 열려있는 화장실 (출처: The Harvard Crimson)


다양한 문화 충격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을 무렵 건너온 뉴욕에서는 그 다양성이 한 차원 높은 느낌이었다. 처음 근무했던 병동의 한 교수는 그의 사무실에서 나에게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말하며 책장의 남편과 아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곤 했었고, 그 외에도 동기, 교수, 후임, 환자를 불문하고 수많은 (성,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낯선 느낌도 잠시, 나는 그들에게 묘한 연대감을 느끼곤 했었다. 가령, 내가 환자에게 당한 인종차별적인 경험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중년의 백인 남자 교수가, 자신이 환자에게 들은 동성애자를 모욕하는 언사를 들은 경험을 해주었을 때, '아 이 사람이 나를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곤 했었던 것이다.


미국에 건너오려는 의사분들에게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인종차별에 관련된 것들이다. 가령, 병원에서 인종차별을 당하지는 않는지, 아시아인이라고 꺼리는 환자는 없는지. 돌이켜보면, 나도 아마 비슷한 고민들을 했었을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인종차별은 존재한다.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경험하는 학계는, 어느 정도 인종차별을 보호해주는 방파제가 형성되어 있다.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기도 하지만, 일단 인종차별적인 행동을 했다가는 학교차원에서 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병원은 정말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의료진이나 직원들이야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버블이 형성되어있다고 해도, 환자들은 다르다. 환자들 중에는 당연히 인종차별주의자도 있고, 험한 꼴을 당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에 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한 사회의 소수자로서의 경험들이 나에게 크나큰 자산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가 되어 살아본 경험을 통해, 나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정신과 환자들의 경우, 어떤 형태로든 사회에서 소외되고, 주류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민자로서, 소수 인종으로서 내가 살아온 경험들이, 정신과 의사로서 나에게 크나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딸아이로 돌아가서,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걱정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가뜩이나 인종간 갈등이 극명해지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범죄가 증가하는 시점에, 미국에 온 것이 잘한 것인지에 대해 가끔 자문하게 된다. 내가 소수 인종으로서 겪은 이런저런 경험들이 딸아이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아파진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심각했던 올해 봄, 딸아이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 앞을 산책하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한 흑인 할머니가 우리 아이를 약간 인상을 쓰는 것 같은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시 하도 아시아인 들에 대한 혐오 범죄가 연일 뉴스화 되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막 창궐하던 때라 나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었다. 혹시 아시아인이라서 우리를 안 좋게 보는 것은 아닐까.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산책을 시키던 중, 할머니가 딸아이를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이가 너무 예쁘네요.


순간 할머니에게 너무 미안했다. 늘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면, 환자들 또한 나를 진심으로 대한다고. 그리고, 아마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의 선입견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정신과뿐 아니라, 모든 상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내 잣대로 재단 혹은 평가하지 않는 자세 (nonjudgmental approach)이다. 그날 이후로, 일 뿐만 아니라, 나의 일상에서도 그 자세를 유지하고자 노력한다.


이번 할로윈 때 코스튬으로 딸아이는 모아나를 골랐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싱크로율이 매우 낮겠으나..) 마우이가 되었다. 모아나가 기존의 디즈니 만화와 다른 점은 피부색만은 아니었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우이는 왕자가 아니라, 모아나의 조력자일 뿐이다. 모아나는 강한 풍랑에 맞서 항해하는 진취적인 주인공이었다.

당당하게 바다를 헤쳐나가는 모아나 (출처: 디즈니)

내 딸아이도 모아나처럼 당당하게 바다를 헤쳐가길 바란다. (라고 썼다가 지웠다)


생각해보면 모아나의 고뇌 또한, 아버지의 기대와 본인이 바라는 바가 달랐을 때 시작되었다. 어렵겠지만, 내 딸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아빠로서의 최선 또한 내 기대와 기준으로 딸아이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부모로서 우리는 마우이처럼 항해를 가르쳐 주고, 뒤에서 조력해줄 뿐이다. 우리 가족 모두 코로나로 많이 힘든 한 해지만, 올 해 할로윈은 꼬마 모아나 덕분에 즐거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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