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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의사 나종호 Dec 29. 2020

우리 생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픽사의 새 영화 <소울> 후기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것 만으로 할 일은 다 한 거예요. 그 다음에는 행복해지기만 하면 돼요.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신해철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몇 년 전부터, 줄곧 비슷한 메시지를 던져왔었다. '신은 당신의 성공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당신이 행복한지에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류의 말들.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 한동안 그를 잊고 살았던 나는,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그런 이야기들을 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었다. 그리고, 청소년기에 나의 가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그가, 중년이 되어 또다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나마 반가우면서도 갑작스럽고도 허망한 죽음에 서글펐던 기억이 난다.


신해철이 사망 직전 찍은 방송에서 했던 말은 많은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다 (출처: JTBC)

(다음 내용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각으로 크리스마스 , 디즈니 스트리밍 채널을 통해 공개된 애니메이션 <소울> 또한 주인공의 갑작스런 죽음에서 시작한다. 주인공인  가드너는 마흔 살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음악가 지망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재즈 클럽에  이후로 재즈 피아노에 대한 열정 하나만을 간직하며 살아온 그는, 중학생들의 파트타임 음악교사로 일하며  마음속으로  무대의 데뷔를 꿈꾼다. 그러던 어느 ,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재즈 뮤지션 앞에서 숨겨온 실력을 선보인 , 당일 8시에 같은 재즈 클럽에서 정식으로 합주공연을  약속을 잡은 . 비로소 그의 묵은 꿈을 실현할  있게  것이다.

<쏘울>의 주인공 조는 마흔 살까지 주목을 받지 못한,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출처: Empire)

설레는 발걸음으로 저녁에 있을 공연을 생각하며 집을 향하던 조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그의 영혼은 '저 세상'에서 다시 현세를 향해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평생 그려왔던 무대를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 그는, 영혼들이 으레 거치는 저승으로 가는 계단에서 이탈하게 된다.

조의 영혼은 저승으로 가는 계단에서 도망친다 (출처: Arstechnica)

그리고, 좌충우돌 끝에 조의 영혼은 공연 직전, 본인의 몸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조는 8시 공연을 앞두고, 본인이 무대에 서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는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부탁한다.

엄마 도와주세요. 제가 만약 오늘 세상을 떠난다면, 제 인생에 이룬 것이 아무도 없을 것 같아요.


조는 분명 열정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객관적인 사회의 성공의 척도로 그의 인생을 바라보면, 그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삼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 치고는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는 편인 것 같다. 5년 전, 나와 대학시절 가장 많은 시절을 보낸 친구를 암으로 떠나보낸 후, 내 인생의 가치관은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아무에게나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앞서 말한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자살로 세상을 떠난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정신과 의사로서 '행복'에 대해서도 자주 생각한다. 내가 만나는 환자들은 많은 경우 삶에서 행복과 멀리 떨어져 있는 (혹은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물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경우도 분명 있지만,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신과를 찾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나는 신해철의 말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할 임무를 다한 것이고, 행복해지기만 하면 된다)에 절반만 동의한다. 즉,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 우리 소임을 다했다는 부분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순간, 행복은 멀어진다는 생각 또한 자주 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행복에 대한 집착 또한 행복을 밀어내기란,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한창 무언가에 미치는게 유행했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우리 삶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많이 주입받는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 무언가에 미치라는 책들은 수도 없이 나왔던  같고,  열정을 바칠  있는 직업을 찾으라는 , 가슴을 게 하는 일을 하라는 말을 줄기차게 들어온  같다. 신해철 또한, 그가 젊었던 시절에는 그런 가사를 자주 썼었다. 소년에게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라고 그는 말했었고, '너의 날개는 펴질 거야'라고 격려했었다. 물론 인생에 뚜렷한 목적을 설정하는 것은 긍정적일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필수적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신해철이 마흔이 넘어 다소 달라진 톤으로 젊은이들을 위로했던 것이, 그렇게 달라진 나의 가치관과 또 한 번 너무 유사해서 놀라곤 한다. 사실, 청년들에게 열정을 강요하는 것과 젊은 시절의 혈기의 촉진제가 될 만큼 격려하는 것은 한 끗차이 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차이를 결정하는 데에는,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의 유무가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한국 사회는 내 생각에는 전자에 대한 무게가 후자를 압도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첫째로, 한국의 젊은이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즉, 더 이상 열심히 살기 힘들 정도로 이미 열심히 살고 있고), 둘째로는, 대부분의 조언들이 그 말을 듣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결국 조는 성황리에 공연을 마친다. 관객들은 그의 숨겨져 왔던 재능에 열광하고, 기립박수를 보낸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그와 함께 공연한 유명 재즈 뮤지션은 정식으로 조에게 본인의 밴드에 합류할 것을 제안하고, 정기적인 공연을 약속한다.

조는 숨겨왔던 본인의 재능을 유감없이 관객에게 뽐낸다 (출처: 뉴욕 타임스)

그가 수십 년간 간직한 꿈이 이루어진 밤, 조는 생각보다 기쁘지가 않은 자신에게 놀란다. 그런 그에게, 그와 함께 공연한 유명 재즈 가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 어린 물고기가, 아버지에게 '전 언젠가는 넓은 바다에 꼭 갈 거예요'라고 말했어요. 아버지는 아이에게, '얘야 우리가 지금 있는 물이 바다야'라고 말하지만, 아이는 믿지 않았죠. 줄곧 바닷속에 있었음에도. 그는 줄곧 바다로 가고 싶어 했어요.


집에 돌아간 조는 혼자 피아노를 치며, 과거를 회상한다. 자신의 소명을 찾은 것만 같았던 아버지와 처음 갔던 재즈 카페,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며 느꼈던 가을 내음, 노쇠한 아버지와 함께 피아노를 치며 장단 맞추던 추억, 재능 있는 학생을 가르치며 느끼던 기쁨... 그렇게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면서, 그는 다시 영혼으로 돌아온다.


조는 말한다. "이제 나는 일분일초를 느끼며 살 거예요" (출처: Metacritic)


우리 인생 또한 그런 게 아닐까. 우린 늘 바닷속에 있지만, 바다를 꿈꾸는 삶을 산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가장 좋았던 기억은, 공들인 논문이 좋은 학회지에 실렸을 때도, 내가 함께 일하던 환자가 나아졌을 때도, 펠로우로 일하면서 좋은 피드백을 받았을 때도 아닌, 아내, 그리고 딸아이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삼 개월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다만, 그 현실에 갇혀 있을 때는 보다 멀리 보이는 목표만 바라보기 때문에, '지금', '여기'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갓 대학생이 되었던 무한궤도 시절의 신해철은,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 때>라는 노래가사에서 이렇게 물었었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사촌 형을 따라 그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던 유치원 생은 이제 어느새 삼십 대 후반의 정신과 의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 환자들을 보건데, 나이가 들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하루하루 내가 사는 이 곳이 바다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잊을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부지런히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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