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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3

본 연재물은 저자가 프랑스어와 정신분석을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에 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오역 가득한 번역본으로 해석에 적잖은 혼란을 줄 여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참고문헌으로 삼기보다는 단순 참고자료로 봐주세요. 오역에 관한 지적은 항상 환영합니다. 전 편에 이어서 진행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년에 Saint-Anne 성당으로부터 특정 방식으로 영감을 받아 '아무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amur : (역자주) mur는 영어로 벽을 뜻하며, amur는 amour(사랑)과 같은 발음을 갖는다. 사랑의 이중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유희) 


아무르는 신체에 이상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미경으로 세균의 형태로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이곳, 그 너머에서 오는 성적 특성입니다. 그것은 죽음, 즉 육체의 죽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아무르에 대한 개념 전개가 이해되지 않으실까봐 전 편 두 단락을 첨부합니다.)


'신체 내에 있는 것'(En-corps : 앞서 언급한 Encore와 같은 발음)은 이로부터 비롯됩니다. 따라서 신체와 세균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균을 수용함으로써 신체가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르에 자국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흔적일 뿐입니다. 육체의 존재는 확실히 성적인 것이지만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부차적이기도 합니다. 경험에서 증명된 바, 대타자를 상징하는 신체의 주이상스란 이러한 흔적에 달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 이것은 그것이 정신분석을 대담하게 진전시킨 것처럼, 모든 우리의 경험이 그에 반하는 것처럼 더더욱 믿을 수 없는건가요? 에로스는 일자를 향한 긴장일까요?


우리는 오랫동안 일자에 대해서 이야기해왔습니다. 일자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작년에 제 담화를 뒷받침했으며, 분명히 이 본원적 혼란의 지점으로 수렴하지 않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욕망은 오직 일자 기표의 본질로부터만 유래된다는 사실을 보이며, 결여로만 이끌기 때문입니다. 최초에 프레게에게 내가 질문을 한다면, 이것은 이 '일자'와 존재와 관련된 것 사이에, '일자'와 존재 뒤에 있는 것(주이상스)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피카소와 사랑에 빠진 잉꼬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앵무새가 그의 셔츠 칼라와 재킷 덮개를 갉아먹는 방식은 어떠한가요? 이 잉꼬는 참으로 인간에게 필수적인 그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사랑했습니다. 이 잉꼬는 (마치 데카르트처럼) 사람(남자)들에게는 '프로-메나드'을 위한 옷입니다.


역자 주 : 원문은 pro-ménade로 표기하는데, 원래 promenade는 프랑스어로 산책이란 의미다. 즉, 산책을 위한 옷des habits이라고 해석 될 수도 있지만, 원문에서는 '앞/지지/대리'라는 의미의 접두사 pro와 ménade를 의도적으로 분리해 기술되어 있다. ménade는 그리스 신화에서 메나드는 술과 축하, 엑스터시의 신 디오니소스의 여사제 또는 수행원이다. 종종 황홀한 흥분 상태에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었으며, 야생 동물이나 심지어 광란에 빠진 사람을 찢어버리는 것을 포함한 폭력적 의식 행위도 진행한다'. 그 기원을 따라 타락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여성을 뜻하기도 한다.


옷은 벗을 때야 비로소 메나드, 곧 어떤 종류의 행복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화에 불과합니다. 이전의 침대와 함께 한 시점으로 수렴되는 신화 말입니다. 더 이상 옷이 없을 때 신체를 즐기는 것은 무엇이 '일자'를 만드는지, 곧 그것의 동일시 문제를 그대로 남깁니다. 피카소와 동일시되는 잉꼬가 옷을 차려 입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옷은 수도사를 사랑하는데, 그곳으로 인해 그들이 누군가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옷 아래에 있고 우리가 신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도 내가 '대상 a'라고 부르는 이 나머지일 것입니다.


이미지를 하나로 묶는 것은 나머지입니다. 정신분석은 사랑이 본질적으로 자기애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헛소리의 본질이 실제로 욕망에 남아 있는 것, 즉 그 원인이자 불만 또는 심지어 불가능성에 대한 지식임을 증명합니다.


사랑은 비록 상호적이지만 무력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단지 '일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일 뿐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이며, 이는 양자 간의 관계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 양자 간의 관계는 누구를 두고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양성(deux sexes)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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