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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깡 세미나 XX Encore : 2

본 연재물은 저자가 프랑스어와 정신분석을 같이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에 되지도 않는 프랑스어로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라는 말도 아까울 정도로 오역 가득한 번역본으로 해석에 적잖은 혼란을 줄 여지가 있습니다. 공식적인 참고문헌으로 삼기보다는 단순 참고자료로 봐주세요. 오역에 관한 지적은 항상 환영합니다. 전 편에 이어서 진행됩니다.

법과 주이상스 간 관계를 한마디로 밝히겠습니다. 용익권(역자 주 : 타인의 소유한 재산을 향유할 권리), - 그것은 법적 개념이죠, 그렇죠? - 그것은 정신분석의 윤리에 관한 세미나(SE VII)에서 내가 이미 언급했듯이, 주이상스와 법적 차이를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유용성, 그것은 누구에게(혹은 무엇에) 유용한 겁니까? 그것은 (언어로 인해) 말하는 존재가 수단으로 삼는 (엄청난 존경심이 향하는) 이성으로 인해 전혀 정의되지 못했습니다. 용익권이란 재산을 누릴 수 있지만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유산의 용익권을 갖고 있을 때,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기만 한다면 그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법의 본질입니다. 주이상스와 관련된 것을 분배하고, 나눠주고, 보상하는 것입니다.


주이상스란 무엇입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소극적인 심급으로 축소되었습니다. 주이상스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여기서 난 주이상스에 관한 법의 장소를 암시하는 유보조항을 지적합니다. 이 법은 의무가 아닙니다. 초자아를 제외해고서는 누구에게도 향유를 강조하는 것은 없습니다. 초자아는 주이상스의 필수 요소입니다. 즐기세요!


이는 분석 담화를 검토하게 만드는 어떤 전환점입니다. 이 여정에서 내가 지나가게 두었던 '여러분 이후' 이 시간에 내가 시작했던 지점, (당연하게도 존경의 마음을 담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고수하는 것을 분석이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시대에 따른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진보가 아니라 회귀이며,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에 대한 고찰로부터 벤담의 공리주의로 이어졌습니다. 후자(벤담)는 언어의 사용 가치가 도구의 지위에 불과하다고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거기로부터 나는 존재에 관한 것, 숙고의 대상으로서 주인적, 즉 최고의 선(善)에 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그로부터 어떤 윤리를 세울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이 침대 위에, 여러분의 계시에 맡기고자 합니다. 저는 밖으로 나가, 다시 한번 이 문 위에 글을 쓸 것이며, 그리하여 아마도 여러분이 나갈 때는 여러분이 이 침대에서 추구했던 꿈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쓰고자 합니다 : 대타자의 주이상스(즉 대타자란 대문자 A이며, 대타자의 신체는 상징화되어 있습니다)는 사랑의 징표가 아닙니다.


확실히 사랑은 어떤 손짓을 하고 있으며 항상 상호적입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매우 조심스럽게 이 감정들이 항상 상호적이라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이는 내게 다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 그 사랑이 항상 상호적인 것일까요? - 그렇고 말고요, 암 그럼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의식을 발명한 이유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며, 사랑이 욕망에 대해 무지한 열정일 수 있다면, 사랑은 욕망의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가까이서 본다면 꽤나 파괴적입니다.


주이상스는 - 즉 대타자의 신체의 주이상스 -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는데 왜냐하면 주이상스를 구성하는 대답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보다 훨씬 나아갑니다. 사랑은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충분한 대답도 아닙니다. 그는 계속 그것을 요구합니다. 그는 다시 한 번(encore) 묻습니다. '앙코르(Encore)' , 그것은 이 결점의 고유한 이름이며, 이것으로부터 대타자 속 사랑에 대한 요구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나오는 그것으로부터 불필요하고 대타자의 신체의 주이상스로 대답하기에 불충분한 무언가가 가능해지지 않나요?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작년에 Saint-Anne 성당으로부터 특정 방식으로 영감을 받아 '아무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amur : (역자주) mur는 영어로 벽을 뜻하며, amur는 amour(사랑)과 같은 발음을 갖는다. 사랑의 이중적 속성을 드러내기 위한 언어유희) 


아무르는 신체에 이상한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미경으로 세균의 형태로 볼 수 있다고 믿었던 이곳, 그 너머에서 오는 성적 특성입니다. 그것은 죽음, 즉 육체의 죽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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