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신의학신문 Jul 10. 2018

때려치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신의학신문 : 최정미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어느날 아침 인터넷 신문에 가슴아픈 기사가 떴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 직원이 업무스트레스로 투신을 했다는 기사였다.
기사 밑에는 그 정도면 그냥 회사를 그만두지 왜 목숨을 버리냐는 안타까운 댓글들이 달려있었다.
 
왜 그는 때려치우지 못했을까? 사정을 알 수는 없다.

단, 역학연구에 따르면 자살의 80~90%가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과적 질환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추정해보면, 혹시 우울증을 겪고 있어 뇌신경전달물질의 변화와 관련된 터널 비전(tunnel vision: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좁은 시야로 판단하게 되는 현상)및 결정장애 증상, 부정적 인지 등이 관련되었을 수도 있겠다.
 
그만두라는 말을 쉽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 '그만두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는 상담 때마다 느끼게 된다.
가족들, 친구들, 주변 상황 다 따지다 보면 그냥 머물러 있는 게, 그저 죽은 듯이 사는 게 정답인 것처럼 느껴지니까 말이다.
 
나도 앞길이 창창한(남들이 보기에) 대기업 연구원을 그만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정말 의욕도 없고, 주어진 일만 하면서, 불평만 늘어난, 매너리즘에 빠진 회사원이 되었을 것 같다.


사진_픽사베이


하지만, 부모님을 포함한 주위의 걱정스러운 눈초리를 견디는 것, 실패한 것 같은 느낌을 떨쳐내는 것이 내게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의대 편입 초반에는 그만두고 싶은 생각으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했던 이유는 의학공부를 할 때는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옆에서 도와준 분들 때문에.
 
그만두어서 잘했다고 느낀 것은 또 있다.
고3 때 진학 특별반을 모아서 학교에서 합숙을 시킨 적이 있었다.
저녁에는 보충수업을 하면서 수학선생님이 일본 정석을 풀어주시고 했는데, 2주 정도 해봤는데 너무 힘들고 재미도 없었다.
그때 나는 과감히 그만두겠다고 얘기했고 배신자가 된 기분을 견뎌야 했다.
그렇지만, 결국 그 반은 큰 효과는 못 거둔 채 폐지되어, 일찍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2 때도 반강제적으로 실시하던 보충수업을 거부했다. 반에서 나 혼자였다.
집에서 학교까지 버스 2번 갈아타고, 시간도 1시간 넘게 걸렸는데, 방학 때까지 그 고생을 하자니 끔찍했다.
선생님께서는 매우 화난 목소리로 "방학 끝나고 성적 떨어지면 큰일 날 줄 알아!"라고 하셨지만, 그때 실컷 놀았던 기억은 지금도 너무 흐뭇하다.
 
그만두는 게 꼭 잘 하는 건 아니다.
나도 그냥 연구원으로 살걸 후회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만둬야 한다고 느낄 때  선택의 키는 꼭 '나'에게 있어야 한다.
그 선택을 할 수 없을 때, 선택권을 빼앗겼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불행해지는 것이다


지치면 안 돼. 그러면 수레바퀴 밑에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헤르만 헤세는 어린 시절 명문학교에 입학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그만둔 뒤 공장을 전전하며 고생했다고 한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썼다.
위의 문구에서 그가 느꼈던 공포가 느껴지는 것 같다.
수레바퀴에 깔릴 것 같은 두려움으로 계속 일하다 보면 결국 지칠 수밖에 없다.
두려울 정도라면 그냥 빠져나오자.


사진_픽사베이


아인슈타인도 명문학교에 적응 못하고 자퇴한 뒤 방황하다 자신을 찾았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도 부모님의 기대에 맞춰 법률학교에 가고, 취직을 했으나 과감히 그만두고 음악을 선택하여 오늘의 명곡들을 남겼다.
 
너무 먼 나라 얘기라고?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출한 신원호 PD도 사실 나와 같은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가수인 루시드 폴도 그렇다.
우리는 모두 그만두었다.
 
때려치울 용기를 내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만둘 용기를 낼 때 의외의 해결 통로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공의 시절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뒤늦게 편입해 육아를 병행하며 전공의 수련을 받던 시절, 밤 11시가 넘도록 암병동을 떠돌며 컨설트를 보고, 주치의 업무, 당직 스케줄에, 발표 스케줄까지 살인적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Burn-out 되어가던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찍히고 욕먹을 각오를 하고 용기 내어 의국장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의외의 조정이 이루어져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때 그냥 있었더라면 나는 아마 공황장애나 심한 탈진 증상으로 그만두었을 것 같다.
 
힘든 세상에 버텨야 할 때가 많고, 버티는 것이 미덕인 때도 많다.
하지만, 죽을 정도로 너무 힘들다면 그냥 때려치우자.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했으니까.
인생지사 새옹지마(人生之事 塞翁之馬)다.






정신의학신문 홈페이지 바로가기

www.psychiatricnews.net

매거진의 이전글 우울한 기분과 우울증은 어떻게 다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