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신문 : 김환기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어느날 병동으로 전화가 걸려온 일이 있었다. 늦은 밤도 아닌, 한낮에 전화를 걸었던 그 여성은 얼마전 병동에 입원해있다가 퇴원했던 30대 환자였다. 그 환자분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치료되어 퇴원을 했었고, 병동으로 환자들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그날도 대수로울 것은 없었다. 그 분은 수화기 너머로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신지’를 뜬금없이 물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만 특별히 심각한 내용은 없었고, 다만 주변의 바람 소리가 매우 심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 것 같다는 직감이 들어 어디냐고 물었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얼마 뒤, 그 환자 분의 부모님이 외래를 찾았다. 진료기록부를 떼러 왔다며 방문한 그 분의 부모님은 바로 그 날 다리에서 투신해 사망한 딸의 소식을 전했다.
오래도록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 일선의 의사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치료한 환자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적어도 하나씩은 가슴 속에 깊이 품고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의 의사들도 예외가 아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죽음에 맞서 환자들과 함께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싸워나가고 있다. 그 고된 전투의 여정이 매번 승리로 끝맺음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슬픈 현실을 세월과 함께 견뎌내면서 말이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멤버 종현군의 사망소식이 전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가장 빛나던 순간에 스스로의 삶을 저버린 아름다운 청년의 비극에, 그를 좋아하였던 모든 팬들도, 팬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큰 안타까움과 슬픔에 휩싸였다. 그 충격적인 사실에 놀란 사람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후벼팠던 것은 전문이 공개된 그의 유서였다. 지인에게 보냈다던 그 유서에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 직전까지 그 자신을 괴롭혔던 그만의 아픔이 고독하게 적혀있었다. 그 짧은 문장문장들에서 토로하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 의사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원망은 우울이라는 괴물이 그를 가장 괴롭혀왔던 악랄한 방법 중의 하나였으리라. 환자들과 함께 우울과 맞서고자 하는 정신과 의사의 입장에서 읽었던 그 유서 글귀에서는, 그의 슬픔과 분노가 더욱 사무치게 다가왔다. 마치 내가 보던 환자들의 죽음을 마주하였을 때처럼, 그렇게 사무치게 다가왔다.
그런데 재능 많고 빛나던 청년이 죽음 직전까지 겪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울의 신음을 바라보는 대중의 그 애도가, 점점 언론의 뜨거운 집중 조명과 함께 이슈와 논쟁거리로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워 진다. 슬픔과 애도는 점차 종현군이 남긴 유서에 담긴 원망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번지고 있고, 그 앞에서는 연신 그 상황을 중계하는 자극적인 언론의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고 있다. 그 야단법석 속에서 오히려 비극을 향한 추모가 흩트려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아이돌이 자신을 가장 비참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우울과 자살에 대한 경각이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일부 대중의 관심은 유서 속 종현군이 남긴 의사에 대한 원망, 자신의 아픔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두고 갈라진 양 진영간의 다툼으로 쏠리고 있다. 우울증은 의사를 찾아가도 해결될 수 없는, 결국 자살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병인것인양 진실을 왜곡하는 뉘앙스의 네티즌 의견들마저 매체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다. 또 정신과 의사는 ‘약만 처방해줄 뿐’이라며 상처받은 마음을 짚어주진 못한다며 종현 군의 입장을 마치 대변이라도 하듯 스스로를 그와 동일시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가 유서에 적은것처럼 그가 찾아갔던 의사가 그의 아픔을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혹은 의사의 지지와 공감이 그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의사와 환자 둘 사이의 교류에서 각자의 왜곡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의사의 필수적인 개입에 상황상의 제약이 여러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여러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환자에게 많은 면담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약처방에 그치는 진료를 할 수 밖에 없는 정신과 의사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중요한것은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그 모든 이야기가 이미 숨을 거둬버린-끝이 난 비극이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우리가 오직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유서에 적힌 그의 한탄과 원망이 가늠하기 어려운 고통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이었을거라는 것 뿐이다. 더 많이 논쟁하고 더 많이 추측할 수록 그의 신음이 담은 고독의 무게가 이용되어갈 뿐이다. 깊은 애도에 더해 이 비극을 통해 우리가 경각심을 갖고 맞서야할 대상은, 우울이라는 병마(魔)이지 그를 둘러싼 시시비비가 아니다. 그것도 진위를 가릴 수 없는 가타부타인데 말이다.
우울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종점을 가질 수 있는 무서운 병이다. 그러나 결코 불치병이 아니며 난치병도 아니다. 더더욱 자살에 다가간 위급한 상황에서는 즉각적인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여러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우울증은 의사도, 자살예방센터도, 약물도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만의 문제라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잘못된 상식이다.
괴테의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당대의 청년 자살률 상승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사랑을 잃고, 이해받지 못한다면 결국 자살해야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베르테르의 생각은 분명, 우울증이 씌워준 색안경으로 심하게 왜곡된 결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베르테르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결코 그 우울이 이끄는 잘못된 선택에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 둘을 분간하지 못하고 대중의 관심만을 쫓으며 자극적인 이슈를 퍼뜨리는 언론들의 행태에는 자살과 생명에 대한 무게감있는 시선이 결여되어 있다. 영국의 가디언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많은 해외 언론에서는 자살에 대한 소식을 전할 때면 자살 예방 전화번호나, 자살 예방 센터에 대한 안내 등을 기입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압도적인 OECD 자살률 1위를 달리는 국가이다. 언론도, 대중도 좀 더 진중한 위기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룹 이름처럼 빛나던 아이돌 청년의 죽음에 정신과 의사로서 더욱 깊은 애도를 표한다.
자살예방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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