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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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회피성 성격장애에 대한 시리즈를 쓰면서 이렇게 후기를 남긴 일이 있었습니다.
지난 글을 쓰고 나서 한동안 '회피성 성격'과 같은 분류가 과연 필요할까?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진단'과 같은 분류체계는 원인, 예후, 치료방법 등에 대해 대략적이고 밋밋한 그림을 그려주지만 낙인 문제, 개인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시킨다는 문제 등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은 순수한 서사시와 다를 게 없"듯이, 개개인의 삶은 다른 모양으로 살아냅니다.
그럼에도 대상자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논문을 쓰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상담 경험이나 슈퍼비전이 줄 수 없는 보다 정제되고 객관적인 지식이라는 점일 겁니다. 상담자의 경험, 슈퍼비전은 밀착되고 풍부한 직관을 주지만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담자와 만나기 위한 툴이 다양할수록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치화된 논문과 정제된 이론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계속 연구하고 글을 써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었어요. 그러고보니 연구와 통계가 과연 "진짜"를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많았던 대학원 시절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심리치료에서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 그 사람의 세계를 함께 펼쳐보는 작업이 더 숭고하고 필요한 경험이야, 하는 마음이요. 그런데 주말동안 임상심리전문가 임민경 선생님의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서문을 읽으면서 정리되지 않던 생각의 파편들이 무척이나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함께 읽어보려고 합니다.
심리학은 자살자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는, 양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인 위험요인과 보호요인을 찾고, 사람들을 최대한 자살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는 학문입니다. 저로서는 그것을 심리학의 한계라 부르기보다는 심리학이 자신의 영역을 잘 지키기도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자살이라는 현상을 모두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더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겁니다.
현대 심리학은 분트로부터 시작되어 실험심리학의 전통이 강합니다. 양적으로 수치화된 경험적 연구, 그리고 연구에 기반하여 개념화된 심리학적 이론들을 정립해나갑니다. 심리학에서도 현상을 기술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주요한 목소리는 아닌데요. 임민경 선생님도 아마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심리학이 어떤 이들의 목소리를 축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해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죠.
이럴 때 저는 문학에 기대게 되는데, 문학은 그저 어떤 현상을 보여줄 뿐 그것의 원인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며, 때로는 증언하되, 가끔은 증언조차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종종 심리학을 앞질러 가기도 하고, 심리학이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먼저 불을 밝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연구와 이론들은 현상을 비추는 시도와 동떨어진 일일까요? 그리고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제 마음에는 계속 이 질문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 구절을 읽어볼게요.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이해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소수의 사례에만 몰두하게 되어 전반적인 흐름을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심리학이든 문학이든, 또 다른 어떤 학문이든 간에 어떤 도구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죽음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서로 경쟁자이기보다는 협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기에 부득이 심리학 이론으로 문학 작품이나 작가의 삶을 해석한다는 다소 무리한 시도를 했습니다만, 이것은 문학 독서 경험을 축소하기 위함이 아니며, 오히려 '내가 가지고 있는 도구로 자살을 힘껏 이해해보려는' 시도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심리학 연구와 이론은 숲 속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든 전체적인 조망을 도와줍니다. 현상을 밀착되지 않은 채로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추상화하고 단순화한다는 단점이 있음에도 우리에겐 심리학이 필요합니다. 심리치료가 어떤 이를 만나서 함께 숲 속을 거니는 일이라면, 심리학이 그 산책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지도가 되어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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