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즐거움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늘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가령 아마미의 검정 토끼 관찰을 통해 볼링공을 묘사하는 경우라도,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 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 올려 (나는 '가설'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늘 곤히 자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따스하고 보드랍고 포슬포슬한 의식이 없는 고양이)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유효하고 올바르게 고양이=가설을 가려내어,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