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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팥크림빵 Oct 20. 2019

Ad Astra

별에 이르도록 혹은 별을 향하여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칠흑 같은 우주에서 인간은 거의 눈에 뜨지 않을 정도의 검은 점이다. 광활한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발버둥치는 검은 점 하나는 희미하고 무력하다. 결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보여주듯 우주는 통제하기 어려워 두려운 미지의 세계이다. 우리의 내면에도 이렇게 통제하기 어려워 애써 거부하고 싶은 심리적 갈등이 흐르고 있다면 어떨까.


  영화는 유년기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껴안으며 스스로 애도하는 과정을 비춘다. 유년기의 강렬했던 유기-우주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는 타인과 어울려 살기보다는 거리두게 했다. 지구의 현실보다는 허공의 우주가 자신의 터전인 것처럼 표정 없는 얼굴로 탐사를 반복한다. 마치 아버지가 그랬듯이 우주 속에서 아름다움을 좇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수 많은 관계와 감정을 차단해오던 그가 아버지를 찾기 위한 여정, 그러니까 변화를 선택하게 됐을까. 아마도 사랑했고 사랑받았던 아내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단했던 기억의 파편들이 침투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떠나버린 아버지에게 받고 싶었던 사랑을 부인하고 거리두는 일은 그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지만, 아내와의 관계에서는 유효한 방식이 아니다. 결국 그녀는 떠나고 그는 우주을 유영하며 고립된다. 기억의 파편들은 ‘나도 그러고 싶지 않은데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걸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제 스스로도 변화의 필요성이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의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대로라면 뭔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살 수 밖에 없다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의 궤적을 따르면서도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차단해왔던 심리적 장벽들 속으로 주인공은 마침내 들어간다.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면서 숨죽여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아버지에게 실패하지 않았다는 위로를 건넨다. 끝까지 아버지를 붙잡아보지만 '놓아달라' 요청한다. 아들보다 자신의 성취와 앎의 발견에 몰두했던, 그럼으로써 아들은 홀로 방치했던 아버지를 힘겹게 놓는다. 울고, 위로하고, 붙잡아도 보지만, 그는 거기에 없다. 고통스러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자 현실에 발을 딛고 관여하고 소중한 것들에 대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마주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애도를 거치면서 그는 이제 고립된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다. 소중한 것들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기 시작한다 ‘actively engaged and attentively focused on precious things’. 지구에서의 친밀한 관계를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지 않고 기꺼이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애도를 통해 남은 한줌의 깨달음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함께하는  일의 소중함일 것이다.


   영화 말미의 아버지와의 만남은 실재였을까?  우주가 그의 내면이었다면 아버지와의 만남도 실재일 필요는 없겠다. 그를 만나기 위한 과정에는 유인원이나 아버지를 폭군이라고 여기는 정부의 방해가 지속된다. 이것 역시, 그의 내면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애써 무시하려는 무의식적인 노력일 것이다.


함께 읽어볼 책의 구절


  치료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다른 아이들과 달리 적절히 반영해줄 수 있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불행에 대해 차차 애도해나간다.


  이상적인 심리치료란 실현될 수 없는 소망을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포기하는 과정, 외상없는 애도 과정이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대체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헛된 소망을 의식 안에서 체념할 때, 현실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에 더 많은 심리적 에너지를 쓸 수 있게 된다.


- Nancy McWilliams, <Psychoanalytic Case Form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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