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각형 인간을 꿈꾸는 우리 딸에게
완벽한 사람, 이른바 ‘육각형 인간’을 꿈꾸는 건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점점 더 큰 이상이 된 것 같다. 나의 딸도 그러했다. 돈과 성취, 공부와 외모, 모든 면에서 완벽을 이루고 싶어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그 욕심이 버거워 보이기도 하고, 마음 한편이 무겁다. 우리가 자랐던 시절에는 성취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지금 아이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어야만 한다는 부담을 느끼며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딸과의 대화는 작은 오해에서 시작되었다. 차 안에서 딸이 "돈 많은 백수"에 대해 이야기하자마자, 남편은 다소 무겁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나 역시 점심을 먹으며 딸에게 비슷한 당부를 전했다. 그래서 딸에게 보내는 글의 제목을 ‘돈 많은 백수를 꿈꾸는 딸에게’라고 붙였는데, 글을 본 딸은 화를 냈다. 알고 보니 딸이 백수를 언급한 이유는 ‘가장 힘든 직업이 무엇일까?’라는 동생의 질문에 답하면서 농담을 주고받던 중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딸은 정말 돈 많은 백수를 동경하는 게 아니었던 걸까?
딸은 차분하게 내게 설명했다.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잖아. 그리고 백수면 정해진 일도 없으니까 한 달 정도는 신날지 몰라도 오래가진 않을 것 같아. 돈이 많으면서 매일 노는 것도 결국은 지겹지 않겠어? 그래서 오히려 돈만 많고 할 일 없는 백수라면 행복할 수 없을 거야. 뭔가 꾸준히 하는 것에서 성취감이 오는데, 백수는 그걸 느낄 수가 없잖아.”
딸은 대안학교에 다닌 경험도 비슷하다고 했다. 일반학교에서 학업을 통한 성취감을 느끼지 못했고, 대안학교에서도 뚜렷한 성취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큰 성취감을 느꼈던 건 4학년 때 집을 만들거나 자전거로 강을 종주할 때였다며, 공부에선 이런 성취감을 얻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다 보니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생활에 대한 불안감이 백수의 느낌과 비슷했다고도 했다.
“매일 공부할 땐 성취감이 있어. 이건 그냥 쇼핑이나 놀이기구를 타는 데서 오는 기분과는 다르거든. 그래서 백수가 제일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해.”
딸의 말을 들으니 대견스럽기도 하고 놀라웠다. 딸은 매일 꾸준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고 있었다. 백수는 매일 도전할 과제가 없는 상태이기에 가장 힘든 직업이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대안학교에서 학력 향상을 위한 목표가 없었다는 점에서, 시간을 낭비했다고 느꼈다는 이야기도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천천히 딸의 말을 정리해 주었다.
“네 얘기를 들으니, 네가 생각하는 백수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것 같아. 하지만 돈이 많은 백수라고 꼭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마음대로 만나며 사는 걸 꿈꾸는 사람들도 많단다. 그리고 대안학교에서 느낀 불안감은 학업과 목표가 뚜렷한 친구들과 다르다는 느낌에서 온 것 같아. 사실 너는 그 시기에도 많은 성취감을 얻었잖아. 자전거 종주를 한 것처럼 너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들이 분명 있었잖니. 학업적인 성취는 아니었지만 이런 성취감이 네가 지금의 목표로 나아가는 데 힘이 되었을 거야.”
내 이야기를 들은 딸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엄마는 백수가 돈과 여유가 많아서 하고 싶은 걸 언제든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재벌이 아닌 이상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아. 그리고 주말에 다들 가족과 보내는 사람들인데, 내가 돈이 많다고 매일 만나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을까? 그러다 보면 백수는 오히려 외로울 것 같아. 실현해나가는 기쁨도 없고, 남들처럼 바쁠 필요가 없으니 정말 매일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는 진짜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
딸과의 대화에서, 아이의 가치관이 궁금해져 물었다.
“평소에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하고,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게 많잖아. 명품 브랜드나 친구들이 쓰는 고급 브랜드도 부러워하지 않니? 돈 많은 백수가 힘들다고 말하는 지금 네 모습이 좀 이상하게 느껴지는데?”
딸은 천천히 답했다.
“물론 돈이 적어서 돈 걱정하며 살고 싶진 않아. 그렇지만 일해서 번 돈을 쓸 때 오는 성취감이 있는 것 같아. 돈이 많아서 그냥 물건을 사기만 하고 인스타에 자랑하는 것보단 내가 일해서 번 돈을 쓰는 기쁨이 더 좋거든. 그래서 정말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돈도 많으면서 자기가 노력해서 이룬 사람,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는 사람이야. 예를 들어, 내가 동경하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개비 토마스처럼 말이야. 하버드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면서도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거, 우리 세대는 그런 사람을 동경해.”
딸의 마지막 말을 들으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단순히 돈 많은 백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돈도 많으면서 자기 일도 잘해내는, 이른바 ‘육각형 인간’을 꿈꾸는 딸의 세대는 더 치열하고 힘든 삶을 요구받는 게 아닐까 싶어서다. 돈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함을 바라는 기대 속에 살아가는 것이니까.
아이에게 ‘성취’란 그저 물질적 풍요를 얻는 것을 넘어, 매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진짜 자신을 채워나가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딸이 동경하는 삶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개비 토마스처럼 완벽해 보이는 사람을 동경하는 건 어쩌면 이 시대 청소년들이 지닌 무거운 이상일지도 모른다.
‘육각형 인간’을 꿈꾸는 딸을 보며, 그저 성취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던 우리의 세대보다 더 힘든 길을 아이들은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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