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를 볶다가 두 가지 생각이 났다. 하나는 남편이 했던 "간단하게 국에다 밥 먹자."라는 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엄마였다.
오늘 처음으로 깨를 볶았다. 결혼해서 살림한 지 16년인데, 깨를 한 번도 볶아본 적이 없다는 게 나조차도 놀라웠다. 사서 쓰면 되는데 굳이 왜 힘들게 볶을 필요가 있을까? 남들은 내가 깨 볶는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참깨는 모든 음식의 마무리를 장식한다. 맛의 멋이고, 정성이다. 없다고 큰일 나진 않지만, 있으면 더 좋다. 요리책에 나오는 '참깨 조금'이라는 표현도 나는 그동안 ‘생략 가능’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어떤 요리는 손이 기억한다. 이제쯤 참깨를 살살 뿌려줘야 하는데, 양념통 속 참깨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 답은 엄마에게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는 일하는 딸을 위해 거의 아이들을 다 키워주셨다. 엄마가 더 젊으셨던 날에는 손녀를 둘러업고 노인당에 가곤 했다. (물론 그때는 아이를 업고 다니는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이들 등하원을 도와주시고, 평생 안 담아본 된장도 담가가며 정성껏 할미밥상을 차려주셨다.
그런 엄마가 요즘은 우리 집에 오시는 일이 점점 드물어졌다. 몸이 부치신 건가. 오실 때는 잔소리만 하시더니, 이제 안 오시니 엄마의 부재가 여기저기서 느껴진다.
참깨도 마찬가지였다. 엄마 덕분에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참깨를 볶지 않고도 살 수 있었고, 지금처럼 참깨를 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엄마 덕분이다. 이제는 한 끼 때우는 것보다, 정성껏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서 고생 중이긴 하다. 그 순간, 남편의 "간단하게"라는 말이 떠올랐다. 상을 차리고, 수저를 놓고, 김치통을 꺼내 김치를 자르고 담고 다시 넣고, 달걀찜을 만들고. 가장 간단하게 삼겹살을 구워도 쌈장과 편마늘은 필수다. 정말 간단한 일일까?
남편의 말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었다. 무심코 뱉은 그의 말이 어느새 내 마음속에 씨가 되어,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말 한마디가...
깨 볶는 냄새는 신혼 때뿐인가? 참깨를 볶다가 한 남자에게 서운함이, 한 여자에게 미안해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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